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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전시

행복만 가득한 SNS에

by 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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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시꺼먼 불행감이 스멀스멀 맴돌았다. ‘요즘 끝내주게 행복하다’ 생각했는데, 최근 고개를 디미는 그 불행 때문에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아 기분도 더러웠다. 그 불행감의 정체를 밝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제 저녁 샤워 중 욕조에 올린 발을 구석구석 닦다 불행의 정체를 알아냈다. 언제나 몸에 따뜻한 물이 닿는 샤워 중에 온갖 양질의 생각들이 번뜩인다.


‘썅. 내가 비교를 하고 있네.’


계속해서 누군가와 나를 빗대어 보고 있었다. 이미 잘하는 것이 많은 어떤 이는 또 못하는 것이 없었다. 어떤 이는 성취를 하고도 또 다른 성취를 끊임없이 모색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고독이 매력이던 어떤 이는 갑자기 찾아온 사랑을 쉴 새 없이 전시하고 있었다. 노력인지, 운인지, 아니면 허세인지 모르는 성공의 난세 속에 작은 내 몸뚱이는 이제 소멸할 지경이었다.


이따금, 성취를 향한 열정의 불씨가 내장을 자극할 때가 있다. 하지만 얼마 못 간다. 성공을 생각하면 불안해진다. <비프>의 대사 “Everything fades.”처럼, 빛나는 성공은 곧 희미해질 섬광으로 보인다. 묵직한 성공을 상상하면 그만큼 가벼워질 가족(나의 경우 우리 개들)과의 시간이 염려된다. 일 중독에 빠져 가정에 소홀한 <패밀리 맨>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되기는 죽어도 싫다. 성취가 필연적으로 동반할 소중한 것의 희생이 무섭다. 누군가 “그것은 너무 결과주의적인 태도”라 지적하며 ‘경험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성과주의자. 결과주의자. 게으른 완벽주의자, 혹은 그냥 게으름뱅이? 모두 틀리지 않다. 그래도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열중하는 것이 있다. 나의 편안함. 몸과 마음의 안위. 거의 매일 맛있게 요리해 먹고, 운동은 매일 하기로 했으나 하기 싫으면 가지 않으며, 웃음과 눈물을 적절히 뽑아내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일주일 중 사흘 정도는 백수 한량처럼 개들과 놀고, 귀엽고 편해 보이는 구제 옷을 쇼핑하며 긍정 호르몬을 마구 분출한다.


안식년 비슷. 안식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는 몰라도 안식이 필요했던 것은 맞다. 성적을 잘 받아 칭찬받기 위해,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못해도 B+이상은 받기 위해, 어린 여자라고 무시받지 않기 위해,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인맥을 쌓기 위해, 쓸모있는 직원이 되기 위해, 우리가 만든 조직을 지켜내기 위해, 직접 가공해 낸 온갖 강박 유령에게 감시받으며 긴 세월을 보냈다. 지난한 삶 중에 피로로 썩어가는 신체의 변화는 외면했다.


“우리는 쓸모 있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깊은 위안이 되는 이야기였는데, 친구 하나는 “그런 말들이 요즘 젊은이들이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다”고 했다. 당시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좀 안주하면 어떤가? 인류 중 그 누구도 발전을 목적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살아가다 보니 성장하게 된 것이고, 우리 세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에 목매는 시기를 살아갈 뿐이다.


언제나 누구보다 빠르고 앞서길 좋아했다. 그러나 결국 이 나이가 되어서야 자신을 용인하고 돌보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인지도.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불행’이 아니라 ‘불행감’이다. 실제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고 믿는 마음.


행복만 가득한 SNS에 불행을 전시하고픈 엉뚱한 생각을 자주 한다. 기분 나쁜 일, 망한 일들을 적어 내려간 글 메모가 십수 개는 되는데, 미완성이라 공유하지 못했다. 요즘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반듯하게 가공되어 경쟁적으로 전시되는 ‘가짜 행복’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불행한 세상에서 동물은 더 불행하다. 인간의 스트레스는 치맥, 삼겹살, 먹방 유튜버 폭식 관망하기로 향한다. 사회에 만연한 분노와 혐오는 약자인 동물에게 가장 먼저 도달한다. 가짜 행복 광란 경쟁 파티. 내 진짜 불행으로라도 중화시키고 싶다.


인용으로 글을 마치면 정성스레 쓰고 다듬은 내 글의 인상이 흐려지는 단점이 있지만, 어제 산 이시 우드(Issy Wood)의 책은 반가운 글로 채워져 있다. 불행도, 실수도 솔직하고 서슴없이 써 내려간.


“그녀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아니면 서서히 힘들어 하다가 세상을 떠났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섭식 장애로 겪는 고통을 기분 좋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겼을까? 당시 내가 했던 자기부정은 미친 짓이었다. 그때 내 신체는 몸이 상하는 건 성공의 결과로, 허약한 상태는 건강한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207 / 이시 우드 / 퀸 베이비


#이시우드 #IssyWood #일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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