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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선생님 그리고 탄이, 벼리

by 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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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우리 마을 입구 사진. 아스팔트 포장 도로도, 집 한 채도 없는 낯선 모습이다.


우리 땅은 오래 방치된 탓에 풀이 우거져 땅 모양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땅 주인 아저씨께 제초를 부탁드렸다. 시골의 인력은 늘 가까이 있다. 이웃 아니면 지인. 제초하러 오신 분도 땅 주인 아저씨의 지인이자 동네 이웃이었다. 그는 앞집 안 선생님과도 지인이라, 내게 “곧 이웃될 사이니, 앞집에 인사나 하러 갈 테냐” 물으셨다. 젠장. 정 선생님이 ‘앞집과는 되도록 말 섞지 말라’ 경고했는데. 하지만 곧 승낙서도 부탁해야 하니 이 기회에 인사나 나누자 싶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후회가 밀려왔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살벌한 집기와 잡동사니. 현관에 다다르자 오래된 펜션에서나 맡았던 냄새가 풍겼다. 밖에서 볼 땐 반듯한 집인데 내부는 집인지 창고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를 발견하고, 나는 인사만 던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꺼낸 지 며칠 지난 듯한 마른 김치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이미 수북한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고 있는 그. 시간은 아침 7시였다.


“누구야? 뭐 하러 왔어?”라는 그의 날선 표정과 질문에 제초 아저씨가 “이웃될 사람이 인사하러 왔다”고 대신 답해주셨다. “그래? 여기 앉아봐.” 하고는 나이, 학교, 직업, 결혼 여부, 가족관계, 부모님 성함, 부모님 직업까지 물으신다. 상견례 경험은 없지만 상견례가 이랬다면 그 결혼은 안 했을 거다.


만만치 않은 상대. 어떤 방식으로 기썬-을 제압할지 판단해야 하는데 자욱한 담배 연기에 판단력이 흐려졌다. 취조실에 끌려온 듯 무방비 상태로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흘려버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목청을 높였다. 짧고 굵은 경험상 시골에선 목소리 크고 말 많은 게 짱이다.


질문 배틀을 하는 것 같았다. 뭐로 먹고사냐 물으면, 나는 선생님은 뭐 하시냐 묻고, 형제 있냐 물으면, 나도 같은 걸 물었다. 바람직한 대화 형태는 아닌데, 제법 리드미컬한 랠리가 이어졌다. 정 선생님과의 대화가 교양 있다면, 안 선생님과의 대화는 말문이 터진달까? 말을 다듬거나 예쁘게 할 필요가 없었다. 격 없는 친구 사이 같아 나도 모르게 말이 짧아지기도 했다. 한 20분 지나니 그와 똑같이 내 발 하나도 의자에 올라가 있다. 이런걸 거울 효과라고 하지, 아마?


서로의 공통점 찾기도 지겨워질 무렵, 그는 뭔가 떠올랐는지 방에서 주섬주섬 서류 뭉치를 꺼내 보여줬다. 옛날 건축허가 문서였다. 누렇게 변색되다 못해 삭아서 군데군데 바스러진 종이. 옛날 타자기 서체들. 아날로그 시대답게 서류량이 엄청났다. 서류를 넘기던 중 접착력이 다한 옛 사진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도 옛 사진에 반가워하며 추억을 떠올렸다. 그가 이곳의 첫 주민이었나보다. 도로를 내면서 주인 모를 무덤들을 이장(移葬)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우리 땅 맞은편엔 나라에서 사들여 녹지화시킨 공터가 있는데, 그 땅에 예전엔 모텔이 있었고, 그보다 전엔 고시원이 있었다 한다. 산골짜기의 작고 외딴 마을에 과거엔 모텔 손님들과 고시생들이 들락날락했다니. 30여 년 전의 북적임을 상상해 본다.


안 선생님은 까만 개 ‘탄이’와 털북숭이 개를 키우고 계셨다. 털복숭이는 왜 이름이 없냐 물으니, 누가 버리고 가서 거둔 개라고 했다. “이름 없으면 개들도 서운해요. 제맘대로 지을게요.” 해버렸고 털복숭이 개를 ‘벼리’라 부르기로 했다.


자세히 보니 탄이 얼굴에는 비늘처럼 뭔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안 선생님이 새끼손톱만 한 걸 똑 떼서 손가락으로 눌러 터뜨리자 시뻘건 피가 사방에 팍 튀었다. 하도 동네방네 돌아다녀서 진드기가 많이 붙었다는데 “진드기약 안 먹인 선생님 잘못이죠!”라 대꾸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잔소리가 통할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해야지. 대신 내가 진드기약을 사다 먹이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진드기약을 먹이고 몇 주 후 다시 와보니 둘 다 진드기가 싹 사라져 있다. 그동안 얼마나 가려웠을까? 약이 드럽게 비쌌지만, 올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 같다. 얘네도 고마웠나. 전엔 낯설어하더니 갑자기 날 반긴다. 왠지 승낙서를 당당하게 요청할 자격이 갖춰진 느낌이 들었다.


안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애들 진드기 없어진 것 보셨냐고 자신감에 겨워 물었다.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더 속이 시원한 건 내 쪽인 것 같았다. 보통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할 텐데 역시 그는 보통이 아니다. 근데 막상 그가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낯간지럽기도 했다. 나는 비싼 약이라고 생색을 내며, 마치 주된 용건이 아닌 척 승낙서 부탁을 덧붙이며 통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아 그리고, 고마워.”

“네? 뭐가요?”

“우리 개들 챙겨줘서.”


마을에서 악명높은 노인. 거칠고 드센 그의 입에서 나온 고맙단 말에 마음이 와장창 녹아내렸다. 아직 삽도 안 떴는데, 마음은 이미 오랜 원주민이 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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