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들의 아저씨

편안함에 이르셨기를

by 문영

그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어제 도수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서다. 한 템포 늦게 업로드되는 팟캐스트를 통해서라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챙기려 했지만, 언젠가부터 뉴스만 접하면 물리적인 두통이 생겨 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병원이나 식당이 뉴스를 보는 유일한 장소다.


오랜만에 다시 본 TV 속 그는 전보다 누렇고 검어진 얼굴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서서 “억울하다”라고 했다. 실제로 만난 적 없어도 개인적으로 그는 비교적 진실한 사람일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굳은 추측을 해왔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진실이나 사실, 심지어 정의마저도 제 역할을 하기 굉장히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언젠가 ‘억울함’ 때문에 내 속이 썩어 들어가고, 함께 속이 문드러지는 나의 동료들을 지켜보아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도 몇 해 전 연말에서 새해로 넘어가던 시기다. 우리는 억울했지만, 억울함을 증명할 진실을 죄다 꺼내 보일 수는 없었다. 진실을 꺼내 보이는 것은 억울함만 상쇄시킬 뿐, 상대의 존엄과 우리의 품위마저 짓밟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억울한 비난을 감내하고, 썩은 속은 원만함의 미덕으로 억지로 덮고 살기로 했다. 이후에도 그런 일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희한하게 연말연시만 되면 그런 일들이 우릴 덮쳤다.


그래서인지 ’억울하다’는 하소연 앞에서 냉정해지기가 참 어렵다. 억울함이 사람을 얼마나 병들게 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가 억울하다 말하는 데는 뭐라도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의 사건에서 진실이란 영원불멸한 중심축이 아니라, 여론을 거머쥔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리돌림당하는 볼모에 불과해 보였다.


중동의 종전이 어려워 보인다는 이야기, 세종시의 목욕탕에서 세 명의 노인이 감전사한 이야기, 어려운 경제 이야기,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 그의 소식은 저녁 뉴스의 짧은 시퀀스를 차지했을 뿐이고, 연이은 머리 아픈 소식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곧 내 치료 순서가 되었고, 대기실 TV로 마저 보지 못한 뉴스들은 도수 치료 선생님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 도봉구의 아파트에서 불이 나 갓난아기를 안고 4층에서 뛰어내린 아버지가 사망한 이야기를 전하며, 선생님은 “다들 새해를 기다리며 기분 좋게 연말을 맞을 텐데, 살아남은 아이는 매년 연말이면 아버지 기일을 챙겨야 할 것 아니냐”며 크게 안타까워했다.


아침부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소방 시설 점검을 예고하는 안내 방송을 전 세대에 송출했다. 오후에 그의 비보를 접하고 당황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마음을 다잡으려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점검 중인 소방벨이 하나씩 하나씩 울려대며 연주를 방해하니 야속했다. 위층부터 벨을 점검하는지 벨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몇 개는 고장 났는지 드릴 돌아가는 소리까지 우렁차게 울려 이내 연주를 그만두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있다 생각하며 마음이 삐죽삐죽 곤두섰지만,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치는 게 어딘가 싶다.


매년 겨울이 되면 그가 나온 드라마를 틀어놓고 일을 하곤 했다. 내 연례행사를 알고리즘도 눈치챈 듯, 때맞춰 다시 보기 목록에 올라 있는 그 포스터를 클릭하고 싶었다. 그런데 올겨울은 쉬이 그러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독특해 방 밖으로 새어 나가면 엄마가 “뭐 하러 그 드라마를 보냐”라고 한 소리 할 것 같아서다. 엄마도 그의 소식에 양가적 반응을 보이기는 나와 마찬가지였으나, 왜 이 시기에 그의 드라마를 보느냐는 물음에 “뭐 어때서”라고 당당하게 말하거나, 그에 대해 엄마와 대화를 이어가기엔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데 이제 그 드라마를 꺼내 보려면 더 많은 내적 갈등을 거치게 됐다.


세상은 이리도 복잡하다. 정의를 믿고 싸우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면에 숨겨진 복잡함에 지치기를 반복한다. 남의 행복을 뺏지 않으면서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 단순한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울까. 우리는 이 세상을 무사히 살아갈 수 있기는 한 걸까.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서로에게 자격이 있는가. 인간의 것이든 비인간의 것이든, 내가 누군가의 ‘존엄’을 해하고 있다면 당장 멈춰야 한다. 해마다 새로운 복을 바라기보다, 해마다 잃어가는 순수성이나 되찾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어야 하지 않나 싶다.

작가의 이전글안 선생님 그리고 탄이, 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