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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2견용

혼자 사는 집이 갖추어야 할 것

by 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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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으려면 건축가와 내밀한 이야기까지 진솔하게 나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자금 사정은 물론, 잘 때 머리 방향까지도. 인륜지대사 중 하나라는 결혼에 관해 중립을 유지하는 나의 경우는 더 그렇다. 1인 2견용 집과 2인 2견용 집 설계는 천지 차이니까 말이다.


내 앞일을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1차 설계가 나오기 직전까지도 나는 ‘혹시’, ‘만약에’ 등 온갖 가정법을 총동원해 존재하지 않는 유령 배우자를 등장시켜 건축가를 혼란케 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은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으니, 심지어는 ‘오며가며’라는 진기한 연애 계획까지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친구이자 친구 같은 분들이지만, 수다쟁이 아지매처럼 별소리를 다 늘어놓는 통에 귀에서 피딱지를 파내진 않으셨을까.


하지만 그간의 대화 맥락으로 보아, 계피와 치토 외의 다른 반려 생명체는 인생 청사진에 없다는 속내를 간파한 걸까. 건축가 선생님들이 정리한 우리 집은 내심 바랐던 ‘1인으로도 충분한’ 공간이 되었다. 대신, 엄마 포함 누구든 날 방해하지 않고 오며갈 수 있는 격리 공간에 대한 고집을 ‘별채’로 실현하게 해줬다. 개들을 제외하고 누구든 내 영역을 침범하면 악마가 되는 성질머리는 본채-별채 간 아름다운 거리두기 덕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괴이한데, 예전엔 만나는 애인마다 결혼하고 싶었다. 혼자 있지도 못했고 함께 있어도 늘 외로웠다. 그랬던 인간의 가장 최근 이별 사유가 다름 아닌 ‘혼자 있고 싶어서’라는 점은 대반전이다. 혼자 있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할까 하다가, 무리한 예시를 하나 들어본다. 소유욕과 모성애를 자극하는 인간 동물, 배우 이도현 씨를 예로 들겠다. 도현 씨가 우리 집에 온다 해도 물을 것이다. “도현 씨… 집에 언제 가요?”(미안해 연진아!)


인생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거라는, 염세적 체념은 아니다. 혼자 누리는 유희의 참맛을 알기 때문이지. 한 가닥 남김없이 혼자 먹는 칼국수는 인생 최고 행복 중 하나다. 둘이 먹으면 대화가 필요해 가닥 가닥의 식감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니까. 이런 글도 혼자 있어야만 쓸 수 있다. 영화도 혼자 봐야 여운이 있다.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말없이 사운드트랙까지 들어야 영화가 완성되니까. 이런 혼생의 희락과 본질을 깨닫게 해준 건 계피, 치토와 함께하는 충만한 시간 덕분일 것이다.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고민을 하다 보면 외로울 틈, 없다. 결국 ‘우리 혼자’였지 한순간도 ‘나 혼자’였던 적은 없구나.


이웃집 정 선생님은 내가 방문할 때마다 집의 면면을 소개해 주셨는데, 집 중앙에 의문의 빈 공간이 있어 무엇인지 여쭤보니 리프트 놓을 자리라 하셨다. 2층으로 무거운 물건 올릴 때 필요한 건가 싶었는데 “나중에 우리 부부 둘 다 휠체어 타는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라신다. 계피의 급작스러운 병세로 계단에서 우당탕 넘어진 일이 결정적 계기지만, 그것이 우리 집에 계단 대신 경사로가 들어서게 된 최초의 불씨다.


혼생의 불편함도 인정해야 한다. 15kg였던 진도 믹스 임시보호견 ‘앨리샤’를 차에 실어야 해 혼자 이동장을 들고 낑낑대다 허리를 삐끗한 일. 생때같은 두 개아들 두고 지방에 구조하러 가야 했던 어느 새벽. 그러다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두 아들을 밤까지 굶긴 날. 그렇지만 짐꾼이나 펫시터 들이자고 결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혼자 잘 살 수 있는 집이어야 했다. 치안은 당연, 수리기사님이 방문해 고칠 기계도 최소화, 재료도 최소화하고, 청소가 용이하도록 구획을 줄이고, 역으로 청소를 안 하는 지저분한 생활 습관도 자연스레 설계와 자재 선정에 녹아들었다.


온갖 ‘만약’으로도 부족해 재난영화 ‹투모로우›까지 들먹이는 안전 과민증 건축주의 요란한 요구들. 당황한 기색 없이 설계에 반영해 주는 초연한 프로페셔널리즘의 건축가 선생님들과 함께였기에, 다행히 혼자 붕 뜨지 않았다.


뚜렷해진 자의식과 적당한 멋 부림이 균형있게 공존하는 나이. 치부의 양이 현저히 줄어든 후에 집을 지으니, 돈 문제 말곤 마음 부대낌이 없다. 이전이었다면? 우리 집은 내 약점을 감추려는 장식으로 둘러싼 요새가 되었을 거고, 건축가와의 소통도 이것저것 숨기느라 삐걱대지 않았을까.


삶을 완성하는 집이기보다, 홀로 잘 살아 보려는 작은 인간의 미완이 희끗희끗 드러나는 집. ‘살면서 채워가는’, ‘정의되지 않은’, ‘미완성의 집’을 짓겠다는 초심을 유지하며 순항하는 듯하다. 예산 부족으로 인해 원했던 것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그 부족한 면모 또한 내 집이오, 삶의 부분이라는 마음으로 앞으로의 과정을 씩씩하게 맞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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