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맞이 새책(헌책) 구입
"하루에 한 페이지씩 읽는다"는 가수 장기하의 말에 머릿속 전구에 불이 켜졌던 어느 날. 진행자 조세호의 농담처럼, 서울대 출신이 하는 말이라 조금 더 끌린 건가, 하고 내 세속성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결과적으로 그의 말은 내 독서 생활에 혁명을 만들었다. 한 권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면서 책을 대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많이는 못 읽어도 자주 읽는다. 책을 디자인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여러 책을 빠르게 접하다 보니 일단 글자가 작으면 인상이 찌푸려지고 심지어 짜증이 난다. 역지사지. 디자인하면서 작은 글자를 고집했던 지난날들을 반성한다.
중고 책을 사는 덴 여러 이유가 있다. 구제 옷을 사는 이유와도 같고, 무엇보다 새 책을 디자인하는 입장에서 책이 낡으면 어떻게 되는지 물성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고, 그런 낡은 책을 쥐게 될 독자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책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니 직접 만져봐야 한다는 핑계로 책 사재기에 충분한 변명이 만들어지는데, 단점은 놓을 공간이 점점 없다는 점이다. 빨리 새집으로의 이사가 시급한 이유다. (?)
주변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나도 좋다. 대화하다 보면 책을 추천받기 때문이다.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내 지인들은 다독가거나 애독가거나 책을 만든다.
1. Juno는 지인 중 가장 책과 친하며 독서가 일상인 사람이다. 새해를 맞아 조금 더 다정하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부드럽고 색다른 문체를 탐구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전화 문의를 했다. 이것저것 까다로운 조건을 메신저로 보내면 안 알려줄 것 같아서. 전부터 언급했던 김지수 기자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그의 부모님의 추천 도서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를 추천받았다. 그는 정신 상담도 잘하지만, 책 큐레이터를 해도 잘할 거다. 다만 그가 추천해 주는 책은 표지나 조판 디자인이 프레시하거나 멋부림은 없는 편이다. 사실 난 책의 겉모습이 구매할 책을 결정하는 큰 요인인데 (I judge a book by its cover), 다독가인 그에게는 역시 내용이 먼저인가 보다.
2. 훌쩍 충북 단양으로 이주한 Linda와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정확하게는 스타벅스 암사DT점 가장 구석 창가 자리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추천해 준 <이갈리아의 딸들>. 무슨 이야기를 하다 이 책을 추천하게 되었던가? 읽다 보면 꼭 떠오르기를. 그가 추천한 다른 책 <성스러운 동물성애자>와 고민하다, 변영주 감독의 추천사가 적혀 있는 쪽을 구매했다. 그렇다. 추천사에 약한 편이다.
3. 영원한 나의 사장님, Beck 실장님이 지난달에 부산에서 잠시 올라오셔서 함께 ‘아트북 컨퍼런스’에 다녀왔다. 걷고 밥을 먹으며 책 이야기를 다양하게 오래 했다. 글을 열심히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드리니 <쓰기의 말들>을 추천해 주셨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읽기에 최적화된 구성이다. 사실 하루에 한 페이지라도 읽는 독서 방법의 장점은, 책을 달랑 한 페이지만 읽고 덮어 버리기는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한 페이지가 재미있으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고, 그러다 보면 하루 최소 10장은 읽게 된다. 자주 읽으면 자연스레 쓰게 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임이 분명하다.
4. 나의 머리맡책방(자기 전에 책을 읽고 자는 편이라 머리맡에 책이 수십 권 쌓여 있다)에서 제일 두꺼운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재미있게 보고 있어 칼럼집 <날씨와 얼굴>을 구매했다. 작가의 다른 책 중에서도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책을 디자인한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 실천’의 조판 디자인과 만듦새를 구경하고 싶어서다. 코팅이 되지 않은 종이의 헤짐, 쿨톤 표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쿨톤 내지가 마음에 든다. 수필집이 일상을 비일상적 시선으로 담았다면, 칼럼집은 사회의 문제를 일상의 시선으로 풀어낸 것이 흥미롭다.
5.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인스타그램에 비유하자면, 비건이 되면 알고리즘에 의해 피드에 등장할 법한 유명한 책이다. 되도록 앵그리 비건이 아니라 다정한 비건이 되고자 노력하지만, 세상이 얼마나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잊지 않도록, 이런 썩 옳은 주장들로 전투력과 긴장감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6. <무해한 하루를 시작하는 너에게>는 내가 좀처럼 구매하지 않는 부류의 책이다. 읽어보지도 않고 이런 말을 한다니 좀 못됐지만, 인터넷 검색으로 나올 법한 노하우들을 모은 것 같은 책들은 책 같지 않다고 해야 할까. 예를 들면 요리책 말이다. (근데 예쁘면 산다.) 허나 세상 사람이 다 나 같지 않고, 판권을 보니 2개월 만에 2쇄를 찍었다. 한 명의 완벽한 비건보다 여러 명의 불완전한 비건이 세상을 더 빨리 바꾼다는 명제를 믿는다. 녹색 색지를 코팅하지 않고 표지로 사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서 구입했다.
그리고 못 산 책들은 여전히 장바구니에 모셔두었다. 새해에 책을 왕창 구입하니 기분이 좋다. 다 읽지도 않을 거지만, 뭐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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