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집일기 최다 출연자 정 선생님 소개
2022년 11월, 정 선생님과 조우하지 않았다면 이 동네로 올 결심도, 이 동네로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는 이 동네의 ‘모세’ 같은 존재다.
우리 동네 마을 길은 건축법상 도로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가 수개월간 군청 공무원과 다툰 끝에 도로로 인정을 받아냈다. 그리고 주택을 지으며 마을의 제1호 건축 허가도 받아냈다. 마을 길이 도로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전부 맹지였던 마을 필지들이 건축 가능한 접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고, 이는 판매 가치가 있는 부동산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허가 건축물에 살며 계속 이행강제금을 내던 어느 이웃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장, 반장도 있지만 이 마을엔 대장 정 선생님이 있다.
대장과 친분을 맺은 것은 천운이다. 복잡한 도로 문제 때문에 외지인이라면 매입할 엄두를 내지 못할 땅의 비밀스런 이모저모를 정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됐다. 이 마을에 건축을 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사용승낙서도 원주민에게 “젊은 사람이 집 짓는다고 승낙서 받으러 갈 건데 내 지인이니 도장 찍어주면 된다”고 연락을 돌려주셨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권력을 등에 업은 재벌 3세가 된 기분이었다.
정 선생님이 이웃으로 유치하고픈 사람으로 간택(?)된 가장 큰 이유는 음악 때문일 것이다. 옆땅 주인의 연락처를 묻다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대략 이러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뭐하러 시골에 오려고요?”
“시골이 좋더라고요. 야밤에 음악도 크게 듣고.”
“무슨 음악 좋아하는데요?”
“좋아하는 게 너무 많은데. 요즘엔 클래식을 자주 들어요.”
“그래요? 나도 클래식 좋아하는데. 이 동네에 음악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는데 잘됐네. 잠깐 시간 되면 음악 듣고 갈래요?”
그렇게 나와, 동행한 한 여사는 그의 집에 초대되었고 ‘잠깐’은 3시간이 되었다.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클래식이 아니라 ‘뉴진스의 하입보이요’라 대답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그의 집 1층은 오로지 음악 감상실만이 자리하고 있다. 커다란 음향기기들. 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각도로 놓인 소파. 소리를 반사하지 않는 모래 벽돌. 창가에 놓인 턴테이블과 액자 속 사진처럼 펼쳐진 뒷산. 타닥타닥 벽난로 타들어가는 소리. 이 정도면 음악 감상을 위해 집을 지은 건 아닐까. 거대한 우드 스피커로 나의 신청곡,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함께 들었다. 결점 없이 귀로 전해오는 음질에 감탄부터 하는데, 벌써 도시 층간 소음에 주눅 들어있던 터라 쩌렁쩌렁 볼륨에 마음이 괜히 불편했다. 눈치 안 봐도 되는 이 충만한 음량이 그리웠다.
다음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을 플레이하며 가수를 맞춰보라 했다. 흰머리로 그의 연령대를 유추하고 난 “사미자? 이미자? 심수봉?”을 외쳤지만 전부 오답이었다. 정답은 웅산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수년 전 자라섬 페스티벌에서 웅산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가평 하면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아닌가. 그의 뒷마당에 카약 끄트머리가 빼꼼히 보여 내 딴에는 농담 섞인 질문을 했다.
“자라섬 페스티벌에 카약 타고 갈 수도 있겠네요?”
“갈 뿐이겠어요? 카약 타고 선상에서 봤죠.”
땅을 보러 다닐 때 주의할 점. 땅의 한두 가지 장점에 현혹되지 않기. 그러나 카약 타고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을 선상에서 즐긴다는 말에 나는 마음을 홀라당 뺏기고 말았다.
그의 집 마당은 너른 잔디 대신 다양한 과실수가 심어진 과수원이다. 사과, 모과, 보리수, 매실, 아로니아, 블루베리. 최근에는 커피를 좋아하시는 사모님이 커피 나무까지 들이셨다. 엄청난 용량의 보리수청과 매실청을 나눠 주셔서 작년에 실컷 에이드를 만들어 먹었다. 그는 기계를 설계하는 엔지니어 출신이고, 차도 직접 고치고, 타이어도 직접 교체한다. 내가 추구하는 자급자족 생활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그는 여러 번 말했다.
"창고에 웬만한 공구는 다 있으니까, 집에 뭐 고장나면 나한테 말하면 돼요."
벌써 그를 알게 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허물없는 사이는 아니지만 낙낙한 허물 정도 두른 예의있고 적절한 관계. 거기엔 아직도 내게 존댓말을 섞는 그의 말투도 한 몫 한다. 한참 어린 사람이지만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말투다. 그간 나눈 대화만 수십 시간. 나도 그렇지만 그도 엄청난 이야기꾼이다. 한국사의 격변기를 관통한 그 나이대 여느 어른들처럼 그의 생애도 굴곡이 많다. 그런 어른들이 손아랫사람에게 권위적인 모습을 자주 본다. 하지만 그는 보기 드물게 굿 리스너인데다 이해심 많고 개방적이다.
종종 집 지을 돈 모자란다고 그 앞에서 곡소리를 하였는데, 어느 날은 집 지어야 해서 살 수 없다던 차를 타고 등장하게 됐다. 정 선생님은 젊었을 때 그 모델을 몰고 전국팔도를 여행했던 좋은 기억이 있고 나는 그 차를 갖고 싶은 사람이라 우리는 그 차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돈 없다던 애가 차를 바꿔 오다니 나조차도 민망해 뭐라 구구절절 사족을 붙일지 난감했다.
“하하하 결국에는!”
“좋은 가격에 중고가 나왔지 뭐예요. 지금 아니면 영영 못 살 것 같아서…”
“잘했어요. 아주 멋지네.”
“집 지을 돈 없다고 징징댔는데 차나 바꾸고. 민망하네요. 그래도 할부랍니다.”
“민망하기는. 나이 들고 보니까 젊었을 때 못한 게 제일 서러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요.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얼마 전에는 거의 완성 단계의 설계 도면을 가지고 그를 찾았다. 아무래도 그가 마을의 역사와 환경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조언을 줄까 해서. 집에 대해 이것저것 지적을 받을까 걱정도 됐다. 정남향 땅인데 마당을 남쪽에 두지 그랬냐, 차는 아무 데나 세우면 되지 뭐 하러 차고가 이렇게 크냐, 왜 경사로로 건폐율을 잡아 먹었냐 등. 내가 설계도면을 꺼내려 하자 그는 말했다.
“됐고, 그거 여기저기 보여주지 마요. 사람들 말 듣다 보면 짓고 싶은 집 못 지어. 집은 내가 짓고 싶은 대로 짓는거야.”
정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젊었을 때 자신이 망설이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여러번 표했다.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하고 싶으면 해요.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로 귀결됐다. 내 젊음은 그로 하여금 실패할까봐 상처 받을까봐 고민하다 하지 못한 과거의 선택들을 상기시키는가 보다. 뼈아픈 조언도 아닌, 텅빈 격려도 아닌, 그의 한결같은 등 토닥거림은 어느새 내게 스며들어 선택의 순간에 무한한 용기를 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