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영 Apr 21. 2024

나, 건축주야!


공사 첫날 현장에 도착하자 요란하게 땅을 파는 포크레인이 보인다. 상하체가 따로 움직이는 게 마치 현란한 테크토닉을 추는 것 같다. 처음으로 갈색 속살을 드러낸 땅. 제초했을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그제야 실감했다. 조문영, 네가 드디어 일을 냈구나.


내가 건축주라는 걸 모르시는 듯한 현장 어르신들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 여기 땅 주인이요.” “아, 여기 사모님이세요?” 어르신에게 사모님 소리를 듣는 것은 불편해 “사모님까진 아니고 그냥 아가씹니다.”라고 해버렸다. 아가씨라니. 급히 둘러댄 단어라곤 하나 시대의 성 감수성에 한참 뒤떨어지는 능글맞은 단어선택이다. 아들 둘이라 하고 그냥 사모님 할걸. 멋쩍음에 커피라도 사 오자 싶어 커피 취향을 여쭈었다. “커피.. 그.. 까만 거 드세요, 아니면 프림 들어간 거 드세요?” 내 딴에는 두 분의 연령대를 고려한 물음이었는데, A어르신이 잘 못 알아들으셨고 B어르신은 해독을 해주신다. “아메리카노랑 라떼 중에 고르라고.”


지정하신 커피를 쥐여드리고 스몰토크를 나누는데 마을 어귀에서 이장님이 등장했다. 뒤이어 앞집 안 선생님도 등장했다. 안 선생님 댁은 현장과 맞붙은 집이라 공사 중 이런저런 양해를 구해야 했다. 마침 도착하신 현장 소장님을 두 분께 소개했다.


잠시 짐을 가지러 간 사이, 현장 소장님-이장님-안 선생님 사이에 ‘관로’에 대한 대화가 진행중이었다. 꽤 오래 이어진 그 대화. 토목 공사 시 알아야 할 관로 위치를 공유하는 대화라고만 생각했다. 상상도 못했다. 그 속에 어떤 이해관계가 얽혔으리라곤. 머리를 긁적이는 현장 소장님의 곤란한 표정을 우연히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장님께 물었다. “저분들이 뭐래요?” “여기 있던 관로를 옮겨서 저기 묻어 달라는데 보통 일이 아니라..” “못한다고 하면 되는거 아녜요?” “그렇긴 한데, 우리는 또 공사하면서 이웃들하고 잘 지내야하니까..” 


그제서야 나는 그 곤란함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악의 무리를 무찔러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들을 처치할 방패는 그 누구도 아닌 건축주, 바로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선생님, 저한테 말하세요. 들어보고 할 수 있는 거면 해드릴게.” 내 등장에 멈칫한 안 선생님. “들어봐. 내가 옛날에 이 땅 주인이었어, 알지? 그때 여기다 비싼 관로를 묻었어. 근데 여기엔 그렇게 큰 관로가 필요없어. 내가 다른거 사다 줄테니까 여기 있는 거 저쪽에 옮겨달라고.” “간단한 작업인지 물어보고 올게요. 근데 복잡한거면 저도 어쩔수 없어요.” “아휴 물어볼 것도 없어. 포크레인으로 몇번 하면 돼.” “알겠어요. 근데, 저도 이 땅 비싸게 산거 아시죠? 땅 아래에 뭐가 있든 제 거예요. 그건 맞죠?” 열변을 토하던 안 선생님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쭈 요놈 봐라?’


그 대화를 끝으로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골의 이해관계는 복잡할 것이 없다. 앞집에 포크레인 온다는 소식에 그는 자기 집에 필요한 주변 공사를 시키려던 것이다. 1:1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는지 나름 권력자인 이장을 중재자 역할로 섭외해서.


이장님과도 정리가 필요했다. 그는 공사 전날부터 내게 “흙이 남으면 어떻게 할 건지” 계속 물었는데, 관로를 옮긴 후 덮을 흙이 필요했던 걸까. 공사 첫날 내가 몇 시에 올 건지 자꾸 묻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건축주 허락도 없이 소장님을 마음대로 부리려 했다니. 창녕 조씨끼리 이러기냐.


“이장님, 저 서운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저한테 터놓고 말씀하세요. 자꾸 흙 남는 거 어쩔지 물어보시던데, 남으면 마을 필요한 데다 채우지 뭐하러 먼 데다 버리겠어요. 제가 뭐 잘못하는 것처럼 그러시니까 기분이 별로네.” ”아이 조문영씨가 뭘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요, 공사 중에 동네 원만하게 하면 좋으니까.“ “여기에 원만하려고 노력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리고요 솔직히 제가 힘들게 번 돈 써서 우리집 짓는데, 흙을 우주에 버리든 관로로 뭘하든 제 권리잖아요?” “그쵸, 그건 그렇죠.”


그날 이후 매일 현장을 찾았다. 피곤하지만 그래야했다. 다행히 악의 무리들은 나타난 적이 없다. 그들은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안 선생님은 고약하지만 작은 친절에도 녹아내리는 마음 약한 노인으로, 이장님은 벚꽃 관광객으로 번잡한 마을의 질서를지키는 착실한 조씨 이장으로.

작가의 이전글 오늘을 사는 개의 벚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