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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Jun 14. 2024

성인 피아노 독학반

이제 진짜 좋아서 치는 피아노


초등학교 6학년 때, 악보대에 소설 <해리 포터>를 올려놓고 연습하는 척 훼이크를 쓰다 들켜 학원 선생에게 혼이 났다. 머지않아 중학생이 되면서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다. 어린 인생의 첫 ‘해방’이었다. 다니고 싶어 다닌 학원이 아니었으니까. ‘집안 형편 때문에 외할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안 보내줬으니, 너라도 피아노를 배웠으면 좋겠다’는 모친의 욕망 투영일 뿐이었지.


그런데, 이제는 시골 가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밤낮으로, 새벽에도 피아노를 맘껏 두들기는 것이다. 기왕이면 디지털 말고 어쿠스틱 피아노를 하나 마련하고 싶다. 마음에 드는 피아노는 일찍이 점찍어뒀다. 전국 야하마 전시장이나 중고 매장 그 어디에도 보유하고 있지 않아 몇 개월을 수소문하던 모델이다. 대단한 모델이라서가 아니라 비인기 모델이어서.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집 근처 어느 연습실에서 보유하고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


잠시, 이 업라이트 피아노의 디자인을 보자. 마치 19세기 청교도 스타일 가구를 연상시키는 절제미. 피아노 디자인에서 찾아보기 힘든 직선미. 오르간 느낌의 신성한 악보대까지. 나를 위해 디자인된 피아노 같다. 아마추어처럼 피아노를 겉모습 보고 판단… 하자!


야마하의 업라이트 피아노.


그렇게 어쿠스틱 피아노와 20여 년 만의 재회. 한동안 디지털 피아노에 익숙해진 손발과 귀는 어쿠스틱 피아노의 음량과 타건감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까지 다르다니. 이 피아노의 물건감은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한다.


이튿날, 다시 연습실을 찾았다. 밤 10시. 아직 깨어있을 모친과의 접촉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묘책이기도 했고, 늦은 시간에 갈 데도 없고, 야밤에 쓸데없이 돈 주고 피아노 연습하는 어른의 여유를 부려보고 싶었다. 언제 집으로 모실지 기약 없는 내(?) 피아노야, 반갑다. 재미로 그랜드 피아노까지 건드리는 바람에 괜히 귀에 기름칠을 했지만, 나는 너로 충분하다. 이제 우리 집 디지털 피아노는 모기가 엥엥대는 것 같더라. 한때는 집 지으면 그랜드 피아노 하나쯤 놓을 수 있을 줄 알았지. 집 한 채 값인지도 모르고.



연습실이 보유 중인 가와이의 그랜드 피아노. 가격은? 알고 싶지 않다.


한참 뚱땅거리는데, 방음벽을 타고 옆방 연주가 제법 잘 들려온다. 어마어마한 실력. 음대생인가? 물 마시러 대기실에 나가보니 중년의 여성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화 내용을 엿들어보니 옆방 연주자의 어머니와 그 친구였다. 둘은 밤을 잊은 연주자의 손목 건강을 걱정하며 연신 하품을 한다. 


'우리 친구, 이 늦은 밤에 입시 연습하러 왔구나? 이모는 놀러 왔지롱.'


성인이 된 내게 피아노는 ‘해독제’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당하겠다. 설렁설렁 대충 치지도 않는다. 나름 목표 의식이 있다. 겨드랑이에 땀이 날 정도로 열중할 때도 있다. 미간을 쥐어짤 정도로 짜증 나고 심각할 때도 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피아노 앞에 자발적으로 앉는가? 당연하다. 잘하지 않아도 되니까. 연습량을 채우지 않아도 되니까.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니까. 이제는 정말 좋아서 하는 거니까.


고단한 사람들에게 악기 하나쯤 다루기를 권하고 싶다. 악기 하나로 누리는 순수한 안식처 하나. 못 한다고, 열심히 안 한다고 나무랄 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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