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섬을 알고 나면 재즈가 더 잘 들릴겁니다
가평에 정착하기 전, 나는 양평 지평면에서 첫 시골살이를 경험했다. 생애 90%를 서울에서 살았으면서 지평을 ‘마음의 고향’이라 생각한다. 언제든 나를 반길 것 같은 곳. 연고 하나 없던 지역에 정을 빨리 붙인 건 특별하지 않은 것들 덕분이다. 뒷동산에 혼자 하얗게 반짝이던 은사시나무, 헤엄치는 고래를 닮아 이름 붙여졌다는 창밖의 고래산, 지역의 친환경 농산물을 팔던 로컬 푸드 상점. 평범하지만 내 일상의 빈틈을 단단히 메우는 것들이 있어 나는 마음을 풀어 놓을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가평, 특히 우리 동네에 빠르게 정을 붙인 것도 비슷한 이유다. 가장 먼저는 이웃이 될 집의 개들. 집 근처 산책로. 산책로의 참나무 무리. 마을의 보호수까지. 내가 그들에게 정 붙였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일상에 자리 잡았다. 다음으로는 그들의 역사를 알게 된다. 유기견이었다 앞집에 얹혀살게 된 사연, 산책로가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무는 몇 살이나 먹었는지. 그리고 이름을 붙인다. 개에게도, 산책로에도, 나무에도. 누군가에겐 그저 뻔한 나무와 길일 뿐인 주변의 것들을 관찰하고, 사연과 역사를 알게 되고, 이름까지 붙이면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이처럼 내가 살아가는 동네, 지역, 세계에 대한 이해는 단지 그곳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 일상의 애정으로 나아간다.
게으른 탓에 아직 집 근처 외엔 벗어나지 못하다, 어느 날 읍내에 나간 김에 자라섬에 가보기로 했다. 네비게이션을 찍어 보니 읍내에서 겨우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읍내 체육관 가러, 마트에 장을 보러 그렇게 자주 갔는데 코앞에 자라섬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오는 10월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이 열리는 그곳으로 갑자기 떠났다.
검색을 하다보면 자라섬이 ‘자라를 닮은 섬이라 자라섬으로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만연하다. 위성사진으로 자라섬을 보자. 자라의 형상이 어딘가 있을 텐데.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가. 좀처럼 자라를 연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금 더 검색을 해보니, 자라섬은 자라를 닮아 자라섬으로 불리게 된 게 아닌 듯하다.
가평에서 말하는 지명 유래설에 따르면 자라섬이란 지명이 생기기 전에 사람들은 이 섬을 “중국섬”이라 불렀답니다. 중국섬이라고 부른 이유는 해방 후 이 섬에서 중국인 몇 사람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인데 이름도 없던 섬에 중국 사람들이 수박이나 참외 농사를 짓자 사람들이 입에 중국섬이란 지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명은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었답니다. 우리 섬을 중국섬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평군에서는 1986년 지명 위원회를 열어 이 섬의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중략)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하던 중에 “자라목”이라 불리는 늪산을 바라보고 있는 섬이니 “자라섬”이라고 하면 좋겠다는 안이 나와 참석자 모두가 찬성을 하여 지금의 “자라섬”이 탄생하였답니다. (출처: 경기문화재단 웹사이트)
즉 섬 자체가 자라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라목’이라고 불리는 늪산을 바라보고 있어 ‘자라섬’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심지어 지명 위원회를 통해 갖게 된 이름이다. 자라섬재즈페스티벌 홈페이지에 적힌 설명을 보니 더 확신이 생긴다.
가평 읍내 부근에 자라목이라는 마을이 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둥그런 봉우리 모양이 마치 자라의 머리와 몸통 같은데, 이 자라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에 위치한 마을이 자라목이다. 이 자라 형상이 바라보고 있는 섬이 바로 자라섬이다. (출처: 자라섬재즈페스티벌 웹사이트)
누군가 자라섬을 자라 닮은 섬이라고 알고 있다면 정정해 주겠지만, 누군가는 자라섬에서 자라를 상상한들 어떠하리. 지명의 유래를 알고 나니 자라섬에 있는 자라 조각상이 더 귀엽다. 자라섬 어딘가 진짜 자라가 헤엄치고 있을 것 같다.
10년 만에 찾은 자라섬에서는 ‘자라섬 꽃페스타’가 막 열리기 시작했다. 5월 말인데 개화가 늦어져 관람객이 적기도 하고 일몰 무렵의 평일 저녁이라 한산한 모습이었다. 꽃에는 영 취미가 없어 꽃페스타가 열리는 남도보다 중도를 거닐기로 했다.
지름 100m가 넘는다는 중도의 잔디 광장. 일상에서 이렇게 동그랗고 넓은 잔디밭을 구경할 일은 흔치 않다. 이곳 잔디 광장에 자라섬의 메인 무대 ‘재즈 아일랜드’가 놓일 모습을 상상해 본다. 10년 전 나도 이곳 어딘가 앉아 무대를 바라보았다.
원형 광장을 지나 섬 깊숙이 들어 오니 고요한 산책로가 펼쳐진다. 여기저기 봄을 맞아 새 모종을 심은 흔적이 보인다. 갑자기 새들의 소리가 가까워졌다. 가평에 있는 새들이 모두 모인 줄 알았다. 제각각 내는 목소리가 꼭 화려한 협주곡의 전주 같다. 강으로 이어지는 천에는 거대한 잉어도 보인다. 모처럼 마시는 맑은 공기와 여유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섬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아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캠핑장과 카라반 사이트가 있는 서도로 이동했다. ‘자라섬 출렁다리’ 표지판이 보인다. 찾아보니 2024년 8월 20일에 개통한 다리라고 한다. 생긴지 1년도 되지 않은 다리. 멀찍이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공원 관리소에서 음악을 틀어 놓은 줄 알았는데, 음악의 근원지는 출렁다리였다. 역시 재즈페스티벌이 열리는 섬답게 낭만이 다리 중앙의 전망대 위에 어느 중년 남성이 오카리나를 불고 있다. 이게 무슨 광경인가 싶다가, 그의 예사롭지 않은 연주 실력에 빠져 한참을 감상했다. 역시 재즈페스티벌이 열리는 섬답게 낭만도 예사롭지 않다.
다리에서 내려와 연못가를 거닐었다. 두 명의 치즈색 고양이가 마주 보고 있다. 아무 말은 없이 눈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때, 연못 위 데크에 또 다른 중년 남성이 철퍼덕 앉는다. 바닥에 악보를 깔고 준비한 리코더를 불기 시작한다. <섬집 아기>. 리코더 소리에 눈이 댕그래진 고양이와 함께 음악을 한참 동안 감상했다.
집에 가는 길에 보이는 현수막 슬로건에 눈길이 간다.
자라섬, Your Own Paradise
지역 홍보 슬로건은 늘 상투적이라 크게 와닿지 않는데, 자라섬은 정말이지 파라다이스였다! 고요한 녹음 속 여기저기 라이브 연주까지. 이곳에서 열릴 재즈페스티벌은 과연 어떤 파라다이스일까.
비만 오면 물에 잠겨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졌던 자라섬, 이 척박한 섬에서 시작된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은 2004년 개최 이래 21회동안 60개국, 1444팀의 아티스트가 다녀간 아시아 대표 재즈페스티벌로 자리 잡았으며 이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성공적인 한국형 음악축제이다. (출처: 자라섬재즈페스티벌 홈페이지)
이렇게 아름다운 천국도가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긴다니 상상하기 어려운데, 그 때문에 쓸모없는 섬으로 홀대받았다는 사실도 놀랍다. 이 척박한 섬에서 소박하게 시작했을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이 올해로 22회째를 맞는다. 이곳 자라섬이 가평 지역 주민들에게는 평화로운 산책 코스로, 페스티벌 기간에는 가평을 찾는 관객의 무대로, 또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축제의 섬’으로 명성을 얻기까지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의 역할이 컸다.
10년 전 자라섬재즈페스티벌에 왔을 때는 이 섬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 줄도 몰랐고, 이 섬의 유래를 궁금해하지도, 구석구석을 둘러볼 마음도 갖지 못했다. 자라섬과 한층 더 친해진 후 만나는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은 어떻게 다가올까? 또 어떤 추억으로 남을까? 올 10월이 기다려진다.
*이 글은 2025 자라섬페스티벌 홍보 자라지기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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