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책이 너를 위로해주길
작업실에는 500권 정도가 들어가는 안정적이고 단정한 나무 책장이 있었다. 집에는 모험하듯 사들인 온갖 정체불명의 책들이 난무했지만 작업실 책장의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만 엄선해서 골라 둔 것이었다. 600권이 되면 다시 신중하게 우선순위를 정해서 분류하고 정리해 500권으로 추렸다.
그 책장에 있는 책은 모두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설사 내가 실종 되어도 이 책장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여길 만큼.
언젠가 하나도 이곳에서 내키는 대로 아무 책이나 꺼내 읽으며 지금의 나를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 책들이 나 대신 아이에게 얘기해주길. 그 이야기가 아이의 마음을 도닥여주길.
언젠가 하나가 지금 내 나이가 되어 사는 게 지치고 모두 다 싫어질 때, 내 작업실로 도망치듯 놀러 오는 꿈을 꾸었다. 그건 정말이지 내가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작업실이 나만의 휴식처이자 피난처였던 것처럼 먼 훗날 내 딸아이에게도 그런 곳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에게 아이가 없거나 글을 쓰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휴식과 위로에 책만큼 좋은 것이 있을 리 없으니 하나가 필요하다면 그 공간은 평생도록 아이를 위해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공간을 유지하는 데는 비용이 든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큰돈이. 2년을 지킨 내 작업실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고 이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정리되지 않는 책 더미와 함께 살고 있다.
지금까지 딱히 책을 읽은 후에 감상을 남긴다던가 좋았던 부분을 필사하는 등의 독후 활동을 해 본 적이 없다. 책은 손에 없으면 불안할 정도로 좋아했지만 책을 읽은 후 마음에 남은 것들을 굳이 옮겨 적는 것이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 시간에 차라리 책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게 나았다. 그러다 작업실을 정리하면서 마음을 바뀌었다. 공간도 책도 언젠가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니까 사라지지 않는 유산을 남겨주고 싶었다.
아이를 위해 내가 읽은 책을 기록해야겠다. 딸에게 물려줄 재산이나 건물은 없지만 나의 독서 리스트는 남겨줄 수 있으니까. 나를 키운 책들이 내가 없어도 너를 키울 수 있도록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