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희정 Feb 10. 2022

언젠가 우리도 노랑 애벌레가 될 거야

꽃들에게 희망을, 트리나 파울루스, 혜원출판사, 1998

이 책을 너에게 소개하려고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 글을 쓰는 엄마가 딸에게 소개하는 책 치고 청소년 도서로 유명한  너무 시시한 거 아닌가? 말이야. 그런 거 있잖아. 그림에 조예가 깊은 사람에게 좋아하는 화가를 물었는데 전 국민이 아는 고흐나 피카소를 얘기하는 것처럼, 이 책을 소개하는 게 그다지 독특하거나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 책은 어릴 때부터 39살이 된 지금까지 엄마의 책장에서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책이야. 지금까지 열 번 가까이 이사를 다니면서 한 번도 팔거나 버리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책이지. 그리고 엄마가 딸에게 책을 소개하는 데 꼭 그럴싸한 것만 고를 필요 없지 않겠어? 남도 아니고 말이야.


사람들은 <어린 왕자>를 나이가 들수록 새롭게 읽히는 책이라고 많이 얘기해. 성인이 된 이후에 읽으면 안 보던 것이 보이고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책이라고. 매번 새롭게 읽혀서 해마다 다시 펼쳐본다는 사람들이 많지. 엄마 역시 그랬고. 그런데 엄마는 어린 왕자도 좋았지만 이 책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어.


참, 엄마는 앞으로 책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 뭐든 다 이야기하려고 해. 그러니 가능하다면 이 글 책을 읽은 후에 봤으면 좋겠다. 스포일러가 담긴 영화 리뷰처럼 나중에 책을 읽으려는 너에게 맥빠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거든.





예전에 '성공시대'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었어. 사회적으로 성공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어떤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는지를 보여주는 다큐 프로그램이었지. 기업인이 많았고 예술가와 운동선수도 있었어. 그 사람들은 밤낮으로 일에 매달렸어. 때로는 건강을 잃어버려 가면서까지 목표를 향해 달렸지. 그 결과 큰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던 거야.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저씨 들이었는데 가족들을 인터뷰하면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열심히 노력하시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했지. 그 아저씨는 아내에게 자신의 빈자리를 미안해하면서 자식들을 잘 키워준 것을 고마워했어.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엄마는 인생의 전부를 자신의 목표에 쏟고 있는 사람이 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까 의아했어.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뿐인데 그게 과연 가족들에게 존경받을 일일까 궁금했지. 엄마라면 얼굴도 보기 힘든 유명한 회사의 회장님 아빠보다 매일 일찍 집에 들어와서 나와 놀아주는 아빠가 더 좋을 것 같았거든.


엄마의 눈에는 성공시대에 나오는 사람들은 일 외의 시간, 특히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잊고 사는 것 같았어.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지. 어떤 업적을 가진 사람이라도 집에 돌아가면 엄마 아빠 남편과 아내일 텐데, 엄마는 그 사람들이 대단한 회장님이 아닌 다른 집 가족의 평범한 구성원으로 보였나 봐. 그들의 성공에는 대부분 물심양면으로 돕는 조력자가 있었고 그 사람의 부모나 아내는 자신의 시간을 떼어내서 그 성공을 도왔을 테니 공평하지 않아 보이기도 했단다. 그 프로그램 인기가 많았던 걸 보면 엄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나 봐.




엄마는 어릴 때부터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했어. 내가 이미 부모님이 꾸린 가족의 일원이면서도 언젠가 이룰 내 가정을 꿈꿨지. 중학교 때 어느 겨울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데 친구들이 집 앞으로 놀자고 엄마를 부르더라고. 그래서 목도리와 장갑을 끼고 나가서 신나게 놀다 잠시 주위를 보는데 거기에 혼자 나온 어른은 없는 거야. 다 아이들과 함께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둘이 눈 오는 밤을 만끽하고 있었지. 그때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도 눈 오는 날 밤에 밖에서 가족들과 있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됐어. 집 안에서 우두커니 앉아 창 밖을 보는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주고는 엄마가 되고 싶었지. 그렇게 엄마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과의 시간을 꿈꿔왔어. 그러고 보니 소원을 이뤘네! 고마워 하나랑 오빠 덕분이야.


외할머니께도 여쭤봤지. 전 세계를 누비며 성공하는 딸과 엄마 옆에서 평범하게 사는 딸 중에 누가 좋으냐고. 너도 알게 되겠지만 외할머니는 엄마보다 더 용감한 사람이라 당연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성공한 딸이 좋다고 했어. 얼굴은 몇 년에 한 번만 봐도 괜찮다고. 정 보고 싶으면 할머니가 비행기를 타고 찾아오겠다고 하셨지. 그런데 엄마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 애초에 '엄마 옆에서 같이 살자.'라는 대답을 바라며 했던 질문이었거든. 성공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어린 나이에도,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학창 시절에도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거나 성공하겠다는 욕심이 별로 없었어.


엄마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외할머니에게 그랬대. 나는 봄에는 벚꽃도 보고 좋아하는 영화가 나오면 영화관도 가고, 연애도 할 거라고. 그걸 못하고 좋은 대학교에 갈 바에야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걸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낮은 대학에 가겠다고. 우리나라에서 공부만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기니까 엄마는 그 시간도 행복하고 싶었거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것도 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어. 당장 내일 교통사고로 죽어도 대학에 가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고 했는데 아쉽다며 눈을 감고 싶지는 않았지. 그 얘기를 듣고 외할머니는 엄마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예술가들은 저러나 보다 생각하기로 하셨다고 해.  


엄마가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그런 내 유별난 점을 이해받는 것 같았어. 내가 설명하기 힘든 점까지 선명하게 그림으로 그려진 기분이었지.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곳에 취업하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꼭대기에 올라가지 않는 삶도 있다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았어.

이 책을 친구에게 선물 받고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내 삶의 지침이 될 책이라는 걸 직감했지. 그리고 정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애벌레들이 다른 애벌레를 짓밟고 기어 올라가는 그 기둥을 보며 소름이 끼쳤어. 너무 무섭고 끔찍했지.


그 기둥은
서로 밀고 밀리며 앞다투어 나아가려는
한 무더기의 애벌레라는 것을······.
그것은 거대한 애벌레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애벌레의 기둥을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적인 성공을 향해 경쟁하는 사람들로 봤지만 꼭 그런 의미만 있는 건 아닐 거야. 평온한 일상이 지겨워진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전이 될 수도 있겠지. 하나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궁금하네. 엄마가 어릴 때는 애벌레들이 기둥에 기어올라가려고 필사적이었던 부분이 워낙 충격적이라 다른 내용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땅으로 내려온 노랑 애벌레와 얼룩무늬 애벌레가 다시 각자의 삶을 찾아 다른 선택을 하는 부분이 좋더라. 특히 얼룩무늬를 따라가지 않는 노랑 애벌레가 얼마나 멋진지 새롭게 알게 됐어.


한동안 그들은 평온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포옹하는 일조차 시들해졌습니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얼룩무늬 애벌레의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삶에는 분명 이보다 더 나은 그 무언가가 있을 거야."


살다 보면 노랑 애벌레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참 많거든. 연인이나 친구, 가족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바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가장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이니까 내 바람이나 목표를 우선순위로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싶을 때가 있거든.

노랑 애벌레는 다시 기둥으로 올라가자는 얼룩무늬 애벌레를 따라가지 않아. 그녀는 얼룩무늬 애벌레 옆에 있고 싶고 그가 원하는 걸 돕고 싶어서 혼란스러워하지. 마음 한구석에는 기둥의 정상에 대한 미련도 있어. 완벽하게 만족을 느끼는 현재란 있을 수 없으니까. 기둥에 올라가겠다는 확신에 찬 그를 보며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이 무능하고 바보 같다고 느끼지. 하지만 그래도 확신 없이 행동하는 것보다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떠나는 얼룩무늬 애벌레를 보며 가슴이 터질 듯 고통스러운데도 말이야.


엄마라면 어땠을까? 엄마는 그 누구보다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 사람인데도 얼룩무늬를 따라 올라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어떤 삶을 살지 확신이 없는데 사랑하는 상대와도 헤어진다면 무척 외로울 테니까. 그럼에도 섣부르게 결정하지 않은 노랑 애벌레가 무척 놀랍고 현명하게 느껴지더라.


하나는 어떤 삶을 살까? 하나는 용감하고 욕심도 많은 아이라서 큰 목표가 없었던 엄마와 달리 성공을 꿈꿀 수도 있어. 인생에서 3년쯤 목표를 위해 잠도 줄이고 하고 싶은 것도 참으며 노력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성공할 자격이 있는 멋진 자세지. 외할머니가 바란 것처럼 전 세계를 누비는 사람이 될 수도 있어. 그건 또 얼마나 멋질까!

이 책이 그 노력을 무의미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란다. 엄마도 너에게 성공보다 가족과의 시간이 더 중요하니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그건 가치 있는 일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영광이지.


엄마는 다만 하나가 가는 길의 방향을 분명하게 알고 달려가길 바랄 뿐이야. 네가 진정으로 원할 때에 말이야. 그렇지 않고 남들을 따라 무작정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다 보면 기둥의 끝에 다다른 애벌레들처럼 허무한 결말을 맞이할 테니까. 그리고 만약 하나가 아내 혹은 엄마가 된다면 그들에게도 네 삶의 시간을 나눠주렴. 그건 성공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이니까. 책 이야기로 시작해서 잔소리로 끝내서 미안. 다음 편은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볼게.



매거진의 이전글 딸에게 물려주는 엄마의 독서 리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