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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Feb 27. 2022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기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2016

하나야 안녕. 엄마는 이 글을 읽는 네가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 거나 중학생일 거라 상상하며 글을 쓰고 있어.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나이 때 엄마가 책의 재미를 알기 시작했거든. 네 외할아버지가 가지고 오신 김소월, 윤동주 시인의 책이나(시리즈인 게 분명한 데 어디서 얻어오신 건지 사 오신 건지 이 두 권만 들고 오셨어.) 외할머니가 이건 꼭 읽어봐 했었던 이갈리아의 딸들(게르드 브란튼베르그, 황금가지, 1996) 같은 책이 문제집 사이 엄마의 책장에 오래 꽂혀 있었거든.


너는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니? 엄마는 어릴 때 SF와 추리소설에 빠져있었어. 평범한 소녀에게 판타지의 세계는 오줌이 찔끔 마려울 정도로 짜릿한 경험이었거든. 돌연변이(로빈 쿡, 열림원, 1993)나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는 애거사 크리스티 시리즈들을 봤지. 물론 만화책도 무척 좋아했고. 학교에서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빈 가방을 들고 만화방에 가서 지퍼가 닫히지 않을 정도로 잔뜩 빌려오곤 했었어. 그때 외할머니가 니 나니가 몇인데 만화를 보고 있냐고 타박하셨지. 그런데 너무 웃기지 않아? 그 나이야 말로 만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때잖아. 그 후로 대학생이 되고 엄마가 된 지금까지 만화책을 보고 있으면 외할머니는 종종 여전히 니 나이가 몇인데 만화를 보냐고 하셨어. 외할머니 머릿속에서 정당하게 만화책을 볼 수 있는 나이라는 게 있을까? 그때는 많은 부모들이 그랬단다. 우습지?


조금 더 커서는 시를 좋아하게 됐고, 지금은 에세이를 주로 읽고 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고전은 좋아하지 않아서 그게 항상 엄마의 숙제 같단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병에 걸려 침대에만 누워 생활하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고전을 읽기 적당한 타이밍이 아닐까 상상해. 언젠가는 다 읽겠다 사놓고 한 번도 마지막 장까지 읽지 못한 예술의 탄생(래리 쉬너, 들녘, 2007),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홍지웅, 열린 책들, 2009),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더글러스 애덤스, 책세상, 2005) 같은 벽돌 책들도 그때나 되어야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일 년에 한 번쯤은 끝내지 못한 두꺼운 책 두어 권 들고 혼자 며칠 쉬고 오면 좋을 텐데 생각도 하는데. 아직은 자유롭게 쓸 시간이 나면 일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너를 떨어뜨려놓고 그렇게 긴 기간 여유롭게 책을 보는 게 즐겁지만은 않을 것 같아 엄두가 안 나네.


이번에는 얘기할 책은 <자기만의 방>이야. 엄마가 갖고 있는 책은 민음사에서 2016년에 발행한 거지만 이 책이 요즘 나온 건 아니란다. 무려 1929년에 발표된 책이지.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던 원고를 수정하고 보안해서 한 권의 에세이로 만든 건데, 얇고 작은 책이지만 어쩌면 네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해. 너무 완벽해서 엄마가 책에 대해 무어라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지. 

처음에는 네가 읽던 책들과는 다른 어조로 쓰인 글이 어색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네가 대학 강의실에 앉아서 버지니아 울프라는 유명한 소설가의 수업을 듣는다고 상상하며 읽으면 조금 편할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어렵다면 더 나이가 들어서 읽어도 좋고. 아무리 좋은 책이어도 그 책이 너에게 의미 있게 읽힐 적당한 순간이 있는 법이니까.




살면서 성별에서 비롯된 뿌리 깊은 차별을 너도 느낄 때가 있겠지. 속상하고 억울해서 분노에 차오를 때가 있을 거야. 네 외할머니보다는 엄마가, 엄마보다는 네가 덜 하겠지만 분명 네가 사는 세상에도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해. 이 책이 나온 지 백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여전히 베스트셀러라니 놀랍고 슬픈 일이야.) 그럴 때 엄마는 널 배제하고 억압하는 사람에게 분노하기보다 차별받는 약자에 대한 애정으로 시선을 돌리길 바라. 성과 인종, 부와 권력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단다. 자기만의 방에도 왜 남성이 여성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평가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나와. 그 부분을 너와 함께 꼭 읽고 싶어.



내가 오전 내내 일하면서 얻어낸 것은 분노라는 하나의 사실이었지요. 그 교수님들은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 왜 그들은 화가 났을까? (중략) 예를 들어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고 싶어 한다고 의심하기 때문에 종종 분개합니다. 교수님들, 아니 더 정확하게 부르자면 가장(家長)들은 부분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분개하겠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겉으로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이유 때문에 분개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전혀 '분노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종종 그들은 여성에게 헌신적이며 모범적인 찬미자들입니다. 그 교수가 여성의 열등함에 대해 좀 지나치게 힘주어 주장했을 때 어쩌면 그는 여성의 열등함보다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이 손상되지나 않을까 더 염려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희귀한 보석이었기에 대단히 격절하게 그리고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간직해 온 것이지요. 어느 성(나는 보도에서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지요.)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영속적인 투쟁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용기와 힘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같이 환상을 지닌 피조물에겐 그것은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겁니다. 자신감이 없다면 우리는 요람에 누운 아기와 마찬가지이지요. 이 측정할 수없이 가벼운, 그러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신을 어떻게 해야 가장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겠지요.



자기만의 방에서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건 공간과 돈이야. 버지니아 울프는 그걸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라고 설명하고 있지. 그게 왜 중요한지 아직은 네가 알 수 없을지도 몰라. 너는 네 방이 있을 테고, 방해받지 않고 공부나 놀이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을 테고, 네 나이 또래 아이들 대부분이 생활비를 직접 벌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보살핌을 받고 있을 테니. 하지만 (편지를 제외하고는) 여성이 글을 쓰는 것이 기이하게 여겨지거나 배우나 의사가 되는 일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여성이 돈을 벌고 재산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갖데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25살 이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여럿 낳는 것이 당연했다면 어땠을까. 엄마의 재능이나 돈이 되는 기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야. 부자인 남성을 아버지로 두지 않았다면 가난한 집에서 자라야 했을 테고, 좋은 교육을 받기 힘들었겠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일찍 결혼을 하고 여러 명의 아이를 키우느라 일할 수 없었을 거야. 네가 갖고 있는 그 어떤 뛰어난 재능도 세상에 알리기 어려웠겠지. 

책에서는 왜 예술과 부를 떨어뜨려 놓고 설명할 수 없는지 지난 백 년동안의 위대한 시인들을 예로 들고 있어. 그즈음뿐 아니라 과거 이백 년 동안에도 가난한 시인들은 아주 작은 기회 초차 얻을 수 없었다고, 가난한 집 아이들이 지적 자유로 해방될 희망이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야만적이며 서글픈 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로서, 시적 재능이 내키는 대로 바람처럼 불어 가서 빈자에게나 부자에게 똑같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의 진실성이 없다. 



그래서 여성도 남성처럼 부를 축적하고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얘기해. 엄마에게 글쓰기 수업을 배운 학생 중에 아이 셋 엄마가 있는데 그분의 글에 한 달에 50만 원 만 내 손으로 벌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그분도 직장에 다녔었지만 아이를 낳고 다시 복직하지 못했지. 집에서 세 아이를 돌보며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을 찾아 나가는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어 하셨어. 버지니아 울프가 얘기한 1929년의 500파운드(80만 원)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라니 놀랍지 않니.



돈을 벌고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엄마는 특히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얘기에 무척 공감했어. 공간은 너무나 중요하단다. 엄마가 네가 4살 때 2년 동안 작업실을 갖고 있었던 걸 기억하니? 작은 마당이 딸린 빨간 지붕의 오래된 주택이었어. 지금까지 어린 너희들과 함께 복닥거리는 집에서 일하면서 서재나 책상 하나 없었던 엄마가, 처음으로 내 책상과 내 소파, 내 주방과 심지어 작은 정원까지 갖게 되었지. 거기는 엄마의 작은 낙원이자 도피처였어. 오빠와 너를 아침에 등원시키고 엄마는 부리나케 작업실로 달여갔지. 그리고 밥을 먹는 것도 자주 잊고 일했어. 그래도 행복했단다. 네가 하원하는 4시까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엄마 자신만을 위해 썼으니까. 작업실에서 하는 게 일이든 휴식이든 다 좋았지. 공간은 단순히 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란다. 너만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필요한 거야.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란 건 때로는 여자들에게 참 어려운 일이거든.



만일 여성이 글을 썼다면 그녀는 공동의 방에서 써야만 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 양이 격렬하게 불만을 토로했듯이 -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 채 삼십 분도 되지 않는다." - 여성은 언제나 방해를 받았지요. (중략) 제인 오스틴은 생애 마지막 날까지 그런 환경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녀의 조카는 회상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숙모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숙모님에게는 종종 찾아갈 만한 독립된 서재가 없었고, 또 숙모님이 쓴 작품의 대부분은 공동의 거실에서 온갖 종류의 일상적인 방해를 받으며 쓰여야 했기 때문이다. 숙모님은 자신이 하는 일이 하인들이나 방문객, 또는 가족의 범위를 넘어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더불어 엄마는 네가 평생 자유롭고 도전적으로 살길 바라. 6살의 네가 그렇듯 지금 모습을 잃지 말고 나이 들었으면 좋겠어. 누가 너에게 조신하게 굴라는 멍청한 소리를 한다면 엄마가 널 혼낼 때 네가 자주 하는 것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메롱메롱해버리렴. 엄마는 종종 지나친 자신감으로 과도하게 자신을 높게 평가하거나 뻔뻔하게 자기 자랑을 늘여놓는 남자들을 보거든. 많은 여자들이 겸양의 자세로 말투와 행동거지를 수시로 검열을 하는데 어째서 남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을까 고민하게 돼. 그럴 때마다 이 문구가 떠오르지.



남성의 글을 다시 읽는 것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여성의 글을 읽은 후에 그것을 읽자 아주 직선적이고 대단히 솔직하게 느껴졌지요. 그 글은 마음의 자유와 일신의 자유분방함, 스스로에 대한 커다란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한 번도 방해받거나 저지된 적이 없으며 태어날 때부터 내키는 대로 어느 쪽 방향이건 뻗어 나갈 수 있는 완전히 권리를 누려 온 이 자유로운 마음, 영양분을 풍부하게 공급받았고 훌륭한 교육을 받아 온 이 마음을 읽으면서 나는 물질적 풍요를 느꼈습니다.



끝으로 엄마가 가장 좋았던 문장을 하나가 한 번 찾아봤으면 좋겠어. '글을 쓰는 여성은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한다'는 말이 나온단다. 이보다 분명한 진리는 없다는 생각에 책을 읽다 말고 멈춰서 입속으로 몇 번씩이나 되뇌었지.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에도 엄마가 글을 쓰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엄마는 여전히 글을 쓰지만 글로 돈은 별로 많이 벌지 못하고 있거든. 1인 출판사를 만들고 나서는 제작비를 충당하려고 오히려 돈을 가져다 쓸 때도 있지. 작업실도 없이 거실 테이블과 카페를 전전하며 일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를 엄마 역시 아직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걸 거야. 그렇지만 노력하고 있으니 나아지겠지. 그래서 훗날 너에게 이 글과 공간과 부를 함께 남겨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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