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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Jul 14. 2022

각자의 자리에서 믿기지 않는 행복을 찾는 여정

천 개의 파랑, 천선란, 허블, 2020


어제는 아빠랑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는데 아빠가 우영우 역할의 박은빈 배우를 보며 저런 며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야. 아빠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들으면서 재미있었던 게 엄마는 박은빈 배우 같은 사람이 네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거든. 단단하고 강한 사람 같아서.


부모가 된 후로 엄마 아빠는 이제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내 아이들을 대입시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어. 너를 임신했을 때 버스에서 어떤 남자가 자리를 양보해 줬거든, 너무 고마웠는데 그래 봤자 엄마랑 나이 차이가 얼만 나지 않았을 남자였단 말이야.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결혼을 했더라도 멋진 남자의 배려를 받았다면 살짝 설레었을 수도 있었을 걸? 그런데 그런 생각은 들지 않고 그 청년이 참 멋있고 바르게 자란 게 기특하더라고. 저 아이 엄마는 참 좋겠다 뿌듯하겠다 생각했어. 이제 세상에 남자들은 다 누군가의 아들로 보인다니 놀랍지.


티브이에서 비현실적으로 예쁘고 멋진 연예인들을 봐도 저렇게 예뻐지고 싶다거나 저렇게 멋있는 남자랑 결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어.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제 어른이 된 너를 생각하게 되는 거지. 엄마는 연예인 수지를 보면서 하나 생각을 해. 참 밝고 예뻐서 그리고 다재다능해서. 우리 하나도 저렇게 크면 어떨까 혼자 상상해 보는 거지. 아빠는 가수 겸 배우 혜리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 우리 딸도 해맑고 쾌활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서. 그렇게 사람들을 보다 보면 세상에 멋지고 훌륭한 사람들이 다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게 되더라. 세상 사람들이 다 누군가의 아이처럼 보이고 내 아이처럼 보이기 시작하더라고. 웃기지?



그러고는 이곳에서 성공해 나간 배우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보경에게 속삭였다. 여기가 왜 지하인 줄 알겠어?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니까, 이곳에 네가 뿌리를 내려야 지상에 꽃으로 필 수 있다는 말이야. 아, 이 얼마나 달콤한 대사의 한 줄 같던가.


<천 개의 파랑> 속 이 글을 봤을 때도 그랬어. 책 속에 아직 어리고 젊은 보경을 염려하는 엄마가 되어서, 먼 훗날 이런 달콤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철없고 순수한 하나를 상상하면서 말이야. 허름하고 낡은 지하 연습장을 마치 성공을 위한 발판이나 된 듯 꼬시고 있는 저 사람에게 고분고분 당하고 있는 보경이의 손을 잡고 지하에서 올라와 밝고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나중에 저 건물이 무너져서 보경이 큰 사고를 당하고 꿈을 포기하게 되거든.




엄마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건 이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사는 인물들이 심지어 로봇까지도 주연이나 조연,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여럿의 만남처럼 보였어. 진짜 우리 삶처럼.


아주 짧게 등장하는 편의점 점장조차 머릿속에 이미지가 생생하게 그려졌지. 말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편의점을 하기 전에는 뭘 했을지 그 인물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어. 짧든 길든 그 사람의 숨겨진 삶이 보이는 것 같았어.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공평하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한 작가가 참 좋더라고. SF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이 실제처럼 느껴지고 믿고 싶게 만드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오랜만에 정말 훅 빠져들어서 읽었거든.


누구나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잖아. 어릴 때는 더 그랬던 것 같아.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고, 그게 아닌 걸 알아도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괴로워하지. 사랑받길 원하고 주목받길 원하고. 그런데 사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 일뿐이잖아 우리는. 소설 속 세계에서처럼 보경이나 연재나 편의점 점장이나 수의사 복희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사람은 없지. 그저 그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나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연속이 바로 삶이고 문학인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된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등장인물들을 이름으로 부른다는 점 같아. 여기서 '엄마는'이라고 표시하지 않고 '보경은'이라고 하거든, '언니는'이라고 하지 않고 '은혜는'이라고 하지.

엄마들은 흔히 아이를 낳고 누구누구의 엄마로 오래 지내서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많이 해. 이름을 잃는 건 곧 나를 읽어버리는 거지. 그래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동시에 괴로움을 호소하기도 해. 아이를 키우고 돌보느라 나에게 시간을 쓰는 법을 까먹은 엄마들이 엄마라는 이름 대신 진짜 내 이름을 찾고 싶어 하는 이유야.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이름으로 불린다는 게 참 좋더라.


혹시나 네가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이름을 잃어버려 괴로워하는 엄마들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란다.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는 다 다를 거야. 아이에게 엄마는 우주와 같아서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닫는 것이 충격적일 수 있겠지만,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일 테니까. 하지만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그건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야겠지.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맨 앞에 두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도. 부모와 자식은 참 어렵다. 그렇지?


이 책에도 보경과 두 딸인 연재와 은혜가 나와. 보경의 남편인 소방관은 사고 현장에서 사망하고 그 보험금으로 작은 식당을 마련해서 두 딸과 살아가게 돼. 소설 속에서는 로봇과학이 무척 발전한 시대 배경이라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는 은혜는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상황이거든. 하지만 보경은 형편 때문에 그러지 못하지. 아픈 다리를 고쳐주지 못한 엄마와, 그 사정을 아는 아픈 딸과, 그 사이에서 숨죽였을 동생의 관계가 상상이 되니? 서로를 위해 말하지 않는 슬픔이 항상 따라다녔을 거야.



그날 이후로 보경과 은혜 사이에는 갚을 수 없는 부채가 쌓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어서 결국 서로가 떠안고 있어야 했다. 은혜는 그때부터 바라는 것이 없어졌고 보경은 반대하는 일이 사라졌다.



삶의 격차라는 것이 어느 틈을 비집고 생기는 것인지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부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아이들에게는 다가갈 수조차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우리 부모님도 돈을 벌고,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같은 나이에 이만큼 차이가 나는 걸까. 그 의문이 연재의 생각을 좀먹기 시작한 후 연재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습관이 생겼다.


의사는 소아마비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은혜에게 생체적합성 의족이라는 수술을 권해. 그러면 하지만 소방관의 사망보험금을 수술로 다 써버리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했기 때문에 수술을 포기하고 집과 식당을 사지. 사정을 아는 은혜도 의족을 해달라 요구하지 못해.


주지 못하는 엄마와 받지 못한 아이 사이의 한없는 슬픔을 뭐라 위로할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그런 시기가 온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올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해. 뭐든 걸 다 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걸 네가 아직 어린 나이인 지금도 받아들이고 있거든.) 서로에게 좀 덜 미안해하고 덜 아파하며 지나갔으면 좋겠다.


책을 덮고도 가장 오래 기억나는 문장이 있어.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요? 인간에게는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능이 있나요?"



엄마는 이 문장을 읽으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전에 속으로 생각했어. 당연하지 로봇인 콜리는 알지 못하겠지만 사람들은 오감이라는 게 있거든. 눈빛으로 알고 눈치로 짐작할 수 있지라고. 하지만 연재와 친구 지수의 관계를 보며 그렇게 착각하고 얼마나 많은 오해를 쌓으며 살았을까 생각하게 되더라. 부부 사이나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사실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서, 표현해야 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서 외롭고 괴로운 일들이 생기니까. 그걸 알면서도 엄마는 참 거만하게도 인간에게는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본능을 갖고 있다 생각했더라고.



콜리에게 알려줘야겠다. 인간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기능이 아예 없다. 다들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해. 콜리가 은혜와 연재에게 관절이 망가져서 죽을 위기에 놓여있는 경주마 투데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하면서 '그 어떤 책 보다 더 정확하고 지혜롭다는 인간'의 삶에서 나온 진리로 아프기 전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그리움을 이기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바로 그 방법 '행복'말이야.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행복만이 유일하게 과거를 이길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 책의 결말에 대해 하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콜리와 연재, 은혜는 투데이의 삶을 2주 연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엄마는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혹시 반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2주 안에 어떤 일을 꾸미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거겠지. 정말로 단순히 딱 2주만 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이 많은 걸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닐 거야. 그런데 결말을 보고 나서 이게 끝이야? 이렇게 끝내도 괜찮은 거야? 혼란스러웠어. 허무해서가 아니라 이래도 좋을까 고민이 된 것 같아. 엄마는 이 책을 SF소설이 아닌 삶을 대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며 봤으니까. 하나는 결말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나오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나에게 행복은 뭘까. 이 글을 읽을 때쯤 십대가 되었을 너는 행복하니? 부디 그러길 바라. 그러기 위해 엄마는 엄마의 자리에서 행복을 찾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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