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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Sep 14. 2022

분명한 삶의 태도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근합니다, 김미리, 자기만의 방, 2022


하나야 안녕.

오늘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야.

한식이 지겨워진 엄마는 아침에 토스트를 구었지. 네가 좋아하는 딸기잼을 바르고 식빵 테두리를 잘라서 세모로 만들어 오렌지 주스랑 같이 주었단다. 잘 먹고 있는 널 등 뒤에 두고 외할머니의 주방 식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어.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너의 6살 가을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는 걸 알려주고 싶네. 어쩌겠니 너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랑 고백을 하고 싶게 만드는 아이인 걸.


최근에 엄마가 읽은 책 <금요일엔 시골집으로 퇴급합니다>를 소개해주려고. 5도 2촌 생활을 하고 있는 작가님의 이야기야. 5도 2촌이 무슨 뜻이냐면 일주일 중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시골에서 산다는 뜻이야.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자연을 가까이하며 주말에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돌아오는 거지. 시골이 좋아도 직장이나 교육, 문화시설 등등의 이유로 다 정리하고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자 똑똑한 선택이란다.


엄마는 청주에 살고 있잖아. 그런데 여기는 도시지만 시골 같. 논밭이 있는 도시랄까. 아무튼 조금 애매한 곳이야. 하지만 자연과 가까워서 서울에 살 때처럼 어딘가 벗어나고 싶다거나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지는 않은 것 같아. 여름에 너를 계곡에 데려가고 싶으면 차로 40분만 달리면 되는 곳이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서울에 있을 때도 시골이 궁금하다거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더라고. 엄마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모두 서울에 사셨는데 시골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 뉴스에서 시골의 추석 풍경이 나오면 한옥에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나와서 마당에서 손주들을 맞이하고, 툇마루에서 옥수수를 쪄주는 그런 모습이 나왔는데,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낯설었어.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시골에 대한 로망이 없었던 걸까?


요즘 사람들이 5도 2촌을 택하는 건 아마도 꼭 시골이나 자연에 대한 갈증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사람들과의 복잡한 관계에서 멀어지고 싶기도 하겠지, 주말마다 밀린 숙제를 해결하듯 친구 만남을 정하고 신나게 놀아도 허전한 순간이 오거든. 잠시 내 삶을 off 해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 아마도 학교 가지 않는 날에 친구들과 만나 노는 게 낙일 너에게는 아직 먼 일이겠다.



차로 두 시간 넘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올림픽 대교가 보인다. 나에게는 올림픽 대교가 서울에 다 왔다는 신호다.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곤 했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얼른 내 방 내 침대로 돌아가 편히 눕고 싶은 마음. 시골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가 편히 눕고 싶은 마음. 시골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내 마음도 비슷하다. 주말 시골살이의 끝이 아쉽기도 하지만, 서울의 야경이 반갑기도 한 것이다.
p.26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도 없고, 5도 2촌을 꿈꾸지 않는 엄마가 이 책을 읽으며 널 많이 떠올렸던 건 살아가는 방식 때문이었어. 아주 선명하고 간결한 삶의 태도가 보이거든. 주로 5도 2촌을 하는 사람들은 아이를 포함한 가족인 경우가 많아. 아이들에게 자라면서 자연을 가까이해주고 싶은 마음과, 혹시 모를 시골 살이의 외로움과 두려움도 가족이 함께 있으니 괜찮겠지. 집을 수리할 때도 남편이 있으니 모두 혼자 감당할 필요 없을 테고.


그런데 이 책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야. 돌담을 수리하고, 친구들과 창틀을 고치고, 마당 수도꼭지를 교체하며 자신의 선택과 오래된 집을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의 이야기지. 언젠가 시골에 집을 사겠다 마음먹은 작가는 '언젠가'가 아닌 '지금'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게 돼. 놀랄 만한 일이지.

살다 보면 때로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는 용기가 나를 저절로 움직이게 할 때가 있거든. 정말 대단한 건 충동적인 결심과 선택이 짧은 경험으로 그치지 않고 여전히 그 집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지내고 있다는 거였어.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은 스스로 해결하면서 말이야. 참 멋지지 않니?



드디어 오늘, 두 갈래 수도꼭지를 사다가 부동전에 연결했다. 이제 연결된 긴 호스를 빼지 않고도 따로 물을 쓸 수 있다. 정말 신세계다!
수풀집에 살기 전, 서울 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나는 여지없이 바로 전문가의 손을 빌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골에서는 누군가의 손을 재빨리 빌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서툴고 느리지만 나의 손으로 하나둘씩 해나가고 있다. 망하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본다. 자연스럽게 나의 필요를 세심하게 살피고 작은 불편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기억하게 된다. (중략)
수도꼭지를 바꿔 끼우는 일은 전문가의 손을 빌리는 게 더 빠로고 정확할 테고, 어쩌면 수풀집을 돌보는 사소한 기술은 앞으로 내 인생에 큰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의 필요를 내가 살핀다는 것, 그 필요를 느리지만 나 스스로 충족시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여전히 내 인생에 쓸모가 있지 않을까.
p.144



하나가 4살 인가 5살 때 말이야 놀이터에서 놀다 넘어지고는 그런 말을 했거든. 나는 용감하고 씩씩해! 하더니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나 다시 놀더라고. 옆에서 그걸 보며 얼마나 대견했는지. 나도 하나처럼 용감하고 씩씩해져야지 속으로 다짐했어. 엄마도 살다가 고꾸라질 때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얘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지. 아이를 키우다보면 엄마가 너희를 가르치는 것 같지만 사실 아이에게 배우는 것이 무척 많단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건 책과 여행,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깨닫게 하지.


아마 이 책의 작가도 하나와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아.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 매주 금요일 퇴근 후에 집안을 정리하고 고양이 소망이와 함께 차로 두 시간 반을 운전해서 내려간다고 해. 주말 이틀간 수풀집이라고 이름 붙인 금산 시골집에서 텃밭을 가꾸고 거기서 난 채소로 간단한 요리를 하고, 집을 수리하고 들판과 산을 걷는 주말을 보내다가 다시 두 시간 반을 달려 서울로 오는 여정이지. 내 삶을 어떻게 채울지 선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동력이라고 생각해.



도피든 무엇이든 나는 주말마다 시골집에 갔다. 그리고 주말만큼은 마감 시간과 할 일 목록이 없는 시간을 누렸다. 주말마다 의무적으로 잡던 약속이나 모임도 과감히 패스했다. 그저 방전 상태인 나를 충전하려고 애썼다. (중략)
내가 주말마다 텃밭에서 돌보는 것은 제철 채소만이 아니다. 땅에 뿌리내린 작물들처럼 일상 속에 단단히 서 있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보고 있다. 나는 여전히 세상 속 '쪼렙'이라 수시로 배터리 잔량이 낮아지지만, 괜찮다. 나에게는 매주 돌아오는 주말과 도망가지 않을 텃밭이 있다.
p.48



엄마가 2년 동안 차로 30분 거리 작업실을 갖고 있으면서 경험한 것들로 비추어 보면, 마당이 있는 구옥은 정말 하루 종일 몸을 움직여야 할 정도로 해야 할 것들이 많거든.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노동이 오히려 몸을 정화시켜 준다는 생각이 들지. 분명 손하나 까딱 못할 정도로 지치는데 소비되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얻고 채워지는 느낌인 거야. 그게 마당이 있는 집, 복잡한 생활과 어느 정도 떨어진 물리적 거리에 있는 나만의 공간이 주는 위안이더라고.


언젠가 엄마가 다시 서울에 살게 된다면 어떨까 가끔 상상을 하는데, 수많은 장점 가운데도 가장 곤란할 것 같은 단 한가지 단점이 걸리더라. 그건 고립감이었어. 엄마는 혼자 있는 시간이 중요한 사람이라 아무리 친한 사람이어도 보고 싶으면 바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는 게 때로는 좋았거든. 하나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엄마 안에는 '좋지만 너무 자주 보고 싶지는 않은' 모순되는 마음이 있어. 그러기에는 서울에서 떨어져 있는 지금이 딱 좋거든.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떨어져 있는 거.


나중에 하나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엄마는 널 데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길 선택했을까?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 엄마도 5도 2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네가 성인이 된 후에는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오늘도 질문이 참 많은 독서 기록이네.

하나가 어떤 삶을 살고 있 네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 이 책처럼 선명하길 바랄게. 무모하거나 어리석어 보여도 괜찮아. 너는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이니까.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작년 5월, 시골에 자리 잡은 지 딱 1년이 되던 달. 나는 새로운 분야, 새로운 회사로 첫 출근을 했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시골집을 고쳐 살지 않았다면 내지 못했을 마음이다.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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