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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Dec 06. 2022

열심히 먹이고 위로하기

비건 베이킹, 송은정, 인디고, 2022


하나에게. 이 글을 읽는 너를 상상할 해보면, 너는 좋아하는 아이가 생겨서 옷차림에 신경 쓰기 시작했거나, 푹 빠져있는 책을 읽으며 한 번쯤을 울어봤을 나이였거든. 그런데 꼭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네가 어른이 되어서 찬란한 20대 이거나 중년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 과거 엄마가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에 쓴 글을 읽는다면 어떨까. 그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아이를 키우면서 성별에 차이를 두지 않고 키우려고 했지만 당연한 듯 미니카를 좋아하던 네 오빠와 주방놀이나 엄마 아빠 놀이를 좋아하는 널 보며 어쩌면 성별에 따라 타고난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러면서 더욱 너에게는 기계를 오빠에게는 요리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지.


엄마가 주방에 있으면 너는 엄마 곁을 떠나지 않았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놀아달라 떼쓰던 오빠의 어린 시절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함께 했지. 너는 뭐든 엄마가 하는 걸 하고 싶어 했어. 당근을 자르고 있으면 나도 칼을 달라고 했고, 계란말이를 하고 있으면 뒤집게를 찾아와서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의자를 끌고왔지. 하다못해 샌드위치를 만들어도, 너는 완성된 것보다는 잼을 바르고 햄을 넣는 것을 직접 하겠다고 했어. 김밥도, 피자도 모두 네가 해야 직성이 풀렸지.


엄마는 매일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게 일상이 되었지만 결혼 전에는 주방은 그저 할머니의 영역일 뿐이었어. 아주 가끔 할머니의 생신날이 되면 익숙하지 않은 주방에 들어가 생색낼 만한 요리 한두 개만 어설프게 만들 뿐이었지. 물론, 준비 과정에서 네 할머니를 계속 부르고 뒷정리 역시 할머니 몫이었지만 말이야. 이제는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고, 너희들이 잘 먹는 미역국이나 불고기, 카레 같은 것은 눈 감고도 만들지만 아직도 가끔은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내가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단다. 내가 요리를 하고 있다니! 내가 나 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 넷을 먹여 살리고 있다니! (가끔은 내가 엄마라는 게 믿기지 않을 때도 있어. 큰 금액의 돈을 이체하거나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는 내가 진짜 어른이구나 새삼 놀랄 때도 있단다. 엄마라는 사람이 39살에도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네.)





너를 위한 엄마의 첫 요리는 이유식이었어. 둘째라서 조금 더 수월했지. 다진 소고기 육수를 냉동해 놓는다거나, 브로콜리를 다져서 소분해 놓는 식의 번거로운 과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어.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요리 초보였던 엄마가 빠른 시간 안에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야.


무얼 만들까 레시피를 찾아보거나 조리과정을 고민하지 않아도 익숙한 움직임으로 먹을만한 것이 만들어진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아니? 요리는 삶에 녹아든 창의적인 행위란다. 동시에 이로운 삶을 위해 우리 모두가 익혀야 하는 기술이기도 하지. 식재료가 우리의 입에 오기 까지를 떠올려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까지 알 수 있어. 그래서 요리를 단순히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이라고 생각하면 좀 억울한 부분이 있지.



요리는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 준다. 수 세기에 걸쳐 예술이 그래 왔던 것처럼.



평생 엄마가 해준 밥만 먹다가 배우자가 해주는 밥을 먹고, 자식이 해주는 밥을 먹다가 삶이 끝나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을 거야. 요리하는 사람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나 정신 같은 것을. 그래서 엄마는 네가 싱크대에 의자를 올려놓고 서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면 천천히 요리하는 법을 알려줄 생각이야. 아직은 채소를 먹이기 위해 먼지처럼 작게 다져서 달걀로 이불을 덮어가며 케첩 맛으로 먹이고 있지만, 언젠가 나무 도마 위에 아무렇게 올려놓은 양파와 파프리카, 당근의 싱싱함과 채도에 함께 감탄하는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날도 오겠지? 

하얀 밥 아니고는 싫다는 너와 곤드레 밥에 간장을 쓱싹쓱싹 비벼서 먹게 되는 날도,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네가 김장김치를 쭈욱 찢어 입에 넣는 맛을 알게 되는 날도 올 거야. 그럼 우리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있는 시간 만큼 주방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자. 보글거리는 냄비 앞에 나란히 서서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을 나눌 수 있을 거야.





엄마가 습관적으로 자주 사는 책이 있는데 여행과 요리에 관한 책이야. 다른 점이 있다면 여행 에세이는 자주 읽고, 요리에 관한 책은 사놓고 다시 꺼내 읽는 법이 없다는 거지. 엄마에게 음식에 관한 책은 보물창고에 금화 같은 거야. 당장 쓰지 않아도 마음이 든든한, 베이킹을 전혀 하지 않는 엄마가 베이킹 관련 책이 얼마나 많은 지 아니? 심지어 그 책들은 책 정리 기간마다 후보에 오른 적도 없이 매번 안전하게 책장에 살아남아있지. 엄마는 비건이 아닌데도 이 책을 읽고 너에게 소개하는 이유와 같아. 요리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좋거든. 게다가 실제로 도움이 되지. (이 책을 쓴 송은정 작가님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를 쓰고, 운영하시던 책방에서 작은 전시를 했던 소소한 인연도 있단다.)


책에는 홈베이킹으로 만든 호밀빵을 베어 물었을 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엄마도 몰랐는데 천연효모는 밀의 당분과 공기 중에 떠도는 온갖 균을 먹고 자란다고 해.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사람과 식물, 고양이의 들숨날숨도 섞여 있을 것이고 모닝커피의 향긋한 냄새도 배어있을 것이다. 나의 유일무이한 행성도 그렇게 빚어졌으리라 상상하니 한 입씩 사라질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중략) 배시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 기쁨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확실한 내 것이었다.



내가 만든 음식이 나를 둘러싼 공기와 냄새, 눈에 보이지 않는 균을 흡수해 완성되어 다시 내 입속으로 들어가다니 놀랍지 않니? '나의 유일무이한 행성'이라는 표현이 좋아서 엄마는 이 페이지를 한참 들여다봤어.

엄마와 비슷한 점이 있어서 밑줄 그은 문장도 있었지.



오히려 나는 피곤할수록 더욱 요리에 집착하는 편이다. 괴로운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기대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서. 열심히 먹이고 위로한다.



엄마는 너희들이 학교와 유치원으로 가고 나면 천천히 혼자 아침을 먹는단다. 혼자 먹는 거지만 좋아하는 접시를 꺼내서 이왕이면 예쁘게 담아 먹으려고 해.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따뜻하게 데워서 어울리는 접시에 담아 느긋하게 먹는 걸 좋아하지. 그렇게 먹은 음식이 오늘의 나를 살게 하고, 하원하고 돌아온 너희와 놀아줄 에너지가 되고, 내일의 나를 만들어줄 테니까 말이야. 


언젠가 너도 엄마가 해주는 밥 대신 네 작은 주방에 어쩔 줄 몰라하며 서야 하는 날이 오겠지. 대충 아무거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부디 하지 말아 주렴. 네 몫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스스로를 풍요롭게 먹이고 키우기 위해 요리를 했으면 좋겠어. 그런 의미로 엄마는 오늘도 우리의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주방에서 설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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