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는 것은 입장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종종 가는 카페가 있다. 느슨하게 출근 도장을 찍으며 손님으로 다닌 지 벌써 5년 정도 되었다. 인도를 향해 통창이 나있는 카페라 창가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 보면 자연스레 출입문을 오가는 손님들을 보게 되는데 대부분 성인 여자들, 가끔 남자들, 다시 성인 여자들의 패턴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카페라 다른 곳은 아이들이 종종 목격되는데 유독 이곳은 조용했다. 지팡이를 짚거나 작은 배낭을 멘 할머니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이 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지켜보다 알았다. 때로는 입구의 작은 계단 몇 개가 어떤 손님은 환영받지 못할 거라는 걸 미리 알려준다는 걸. 카페는 1층이었는데 편하게 올라올 수 있게 세 단짜리 나무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도 창 밖에 데크를 만들 때 함께 인테리어 했을 것이다. 그때 계단 대신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이곳은 조금 더 소란스러워졌겠지.
카페 입구는 유모차나 휠체어가 들어가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웠다. 출입문은 좁았고 무거웠다. 자동으로 열리지 않았으며 활짝 열어 고정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거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자 그 작은 계단이 수시로 원망스러웠다.
어느 날은 놀이터가 있는 공원을 지나는 데 바로 앞 카페가 어린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산책을 마친 강아지는 시원한 물과 전용 음료를 마실 수 있지만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를 위한 주스는 없었다. 노키즈존 카페가 하필이면 놀이터 앞이라니 잔인하기도 하지. 더 이상 놀이터에서 놀지 않는 어른들이 모여 그곳에 들어올 수 없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앉아 태연하게 있는 모습이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놀며 매일 차별을 목격할 텐데, 그런 일상을 관망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걸까.
출입문에 NO를 적어 놓지 않더라도 때로는 카페의 메뉴가, 의자의 높낮이가, 사장님의 태도가 그 공간의 성격을 보여준다.
어두운 조도에 높은 바 테이블의 에스프레소 바는 시끌벅적한 단체 손님을 반기지 않는다.
뽀로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카페는 조용히 쉬기 원하는 어른들을 위한 곳이 아닐 확률이 높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카페에서는 텀블러를 지참하지 않으면 음료를 테이크 아웃 할 수 없고,
의도적으로 콘센트를 막아 놓은 곳은 카공족이 머물 만한 곳이 못된다.
하지만 입구에서 거절당하지 않는다면
유아차를 끄는 부모가 에스프레소 바에 커피를 테이크 아웃 하러 올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소음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어른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올 수도 있고,
텀블러는 없지만 자리에서 마시고 가길 원하는 노인과
충천한 노트북을 들고 짧은 시간 머물다 가는 학생이 있을 수도 있다.
입구에서 막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한 번 의식하고 난 뒤로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 죄스러울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을 나는 가뿐하게 통과하고 있구나. 내가 쉽게 지나간 곳에서 배제당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낡고 오래된 건물 3층에 있는 카페에 엘리베이터를 바라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꿈 아닌데, 그저 계단 대신 경사로를 만들었어도 되었을 순간에 바퀴 달린 것에 의지하는(우리가 흔히 약자라 부르는) 사람들을 떠올리지 못했을 타이밍이 아쉽다. 저 세 칸의 계단은 너무나 많은 거절을 담고 있음을 사장님은 아실까.
경사로가 없는 입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는 출입 불가 통보와 마찬가지이며 유아차를 끄는 보호자에게는 노골적인 선 긋기다. 다리를 대신하는 바퀴가 데굴데굴 구르며 입장할 수 있는 카페가 많아지면 좋겠다. 계단과 경사로를 고를 수 있다는 상황이라면 어려서, 아파서, 혹은 늙어서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는 방향으로 선택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