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디자인 팀 리드로 일하는 방식에 대한 기록 (8)
#8. 엑셀(Excel)과 친해지는 중입니다
디자인팀의 매니저가 된 이후 Adobe Creative Cloud를 회사에서 거의 사용할 일이 없어졌다. 간혹 가다 팀원들이 브랜드 디자인 가이드 매뉴얼을 만들어 이를 컨펌할 때 사용한다. 일러스트를 켜고 디테일한 부분을 보며 함께 이야기를 하고 이를 수정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브랜드 디자인과 그래픽 디자인이 베이스이다. 하지만 팀원들의 경우는 대부분이 그래픽 디자인, 모션 디자인, 비디오 에디트 기반이다. 새롭게 출시되는 게임 IP의 태국 현지화 버전, 그 외 해당국가의 현지화 버전에 대한 브랜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할 때가 종종 찾아온다. 내가 작업을 하면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팀원 친구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고 또 분명히 알아야 하는 영역이라 팀원들에게 모두 맡기기로 했다. 어느 날엔 턱끝까지 '내가 할까?'라는 마음이 차올라 일러스트 켰지만 시동이 걸릴 때 나오는 예쁜 그림만 보다가 바로 꺼버렸다. 팀원을 믿고 친구들이 업무를 잘할 수 있도록 돕고 기다려주는 일이 매니저의 업무이기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팀원들에게 브랜드, 브랜딩, 브랜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세션을 갖고 있다. 1년이 지난 지금 점점 친구들의 체계가 잡히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어 기쁘다. 무엇보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일러스트 프로그램을 켤 일도 사라졌다.
2011년도에 브랜드 디자이너로 한국에서 브랜드 에이전시에 입사를 하여 일본, 베트남을 거쳐 태국까지 왔다. 그렇게 2024년 현재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디자이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매일매일을 일러스트와 포토샵의 망망대해에서 놀았다. 하지만 늘 즐거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날엔 도무지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멍하니 하얀 캔버스만 바라볼 때도 있었다. 나의 경우는 아날로그 작업을 선호했기 때문에 종종 그래픽 작업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잠시 뿐이었고 그래도 어찌어찌 극복을 잘했던 것 같다. 그 극복법 중에 하나가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다. 답이 없는 디자인 작업 여정 속의 답답함을 깔끔하게 정리되는 수학 문제를 통해 한결 가벼운 머릿속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고 하나의 취미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연차가 쌓이고 과장 정도의 직급을 달았을 때부터 엑셀과 종종 만나게 되었다. 프로젝트 예산, 견적서 등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얀색 캔버스 위에 그림이 아닌 숫자로 채워지는 프로그램이 꽤 재밌었다. 무엇보다 엑셀 위에서 숫자로 산뜻하게 떨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너무 편리했고 수식을 배워 그것을 적용하고 새로운 시트를 짜는 것이 재밌었다.
오래전 한국의 엘지전자의 디자인팀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했었다. 디자이너 직무라고 해서 입사를 했는데 엘지 베스트샵, HSAD를 관리하는 디자인 매니저 역할이었다. 이때에는 디자이너 타이틀이었지만 거의 90% 업무를 엑셀을 사용하는 업무였다. 이 때 어도비 프로그램을 사용한 적이 정말 손에 꼽힌다. 그래서 팀은 디자인팀이었지만 디자이너 출신은 몇 명 없었다. 내가 생각한 업무와 너무 달라서 종종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때 정말 힘들게 엑셀을 배웠고 퇴사한 이후로도 여기저기에서 잘 써먹고 있다. 역시 삶에서 헛된 것은 그 어느 하나 없는 것 같다.
무튼 엑셀 위에서 산뜻하게 숫자로 떨어지는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오늘도 팀의 리소스를 엑셀 위에서 피봇팅 해본다. 그리고 올해 3-4분기의 프로젝트 예산은 어떻게 배분할지도 고민해 본다. 이 영역은 회사 내부 영역이고 또 클라이언트들과의 외부 영역 등등도 엑셀 친구와 함께 어떻게 만들어갈지 요래조래 고민을 해보는 중이다.
이렇게 오늘도 엑셀과 친해지는 중인데 뭐 이렇게 된 김에 엑셀도 정복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