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관한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서이 Oct 13. 2023

책이 좋은데요, 독서는 아니고요

책에 관하여


섬에서 육지로 가는 길, 운서역에서 봉천역으로 가는 길은 교통편은 편하지만 소요시간이 길다. 만만한 홍대입구역도 1시간, 서울의 동쪽이라도 가게 되면 환승과 함께 2시간은 기본이다. 스마트폰에 의지해 가기에는 배터리가 소중하다. 운서역에는 다행히 책 대출기계가 있어, 운 좋게 맞는 책을 빌려 나간다면 왕복 3시간 거리도 아쉽게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어쩌다 [떨림과 울림]과 같은 물리학 책을 빌려버리는 날에는 잠이라도 푹 잘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최근 지하철에서 읽은 책은 [구의 증명]과 [므레모사]. 모두 자극적이고 얇은 소설이다. 몰입해 읽다 보면 서울나들이 까짓 거 금방이다.


그러나 내가 운이 나쁜 건지 원래가 잘 고장이 나는지 오늘도 터치가 먹히지 않는 운서역 미니도서관. 책을 못 빌린 오늘은 한 시간 반을 졸면서 이동했지만 괜찮다. 피곤하기도 했고, 독립출판 북페어에 가는 날이니 돌아오면서는 책과 함께일 것이다. 책장의 두 칸이 마침 딱 맞게 채워졌는데... 한 칸 더 늘려야겠다. '오늘의 집'에서 산 조립식 합판 책장은 금방 질리는 주인을 만나 대청소 때마다 방 한 칸 안에서 동서남북을 돌아다닌다. 마침내 TV 없는 TV선반 위까지 올라가 버린 책장의 위치가 퍽 마음에 드는데, 눈높이에 책들이 있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자주 이사 다니는 신세라 영종도 들어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책들은 다 광주에 있고 지금도 빌려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서 소장하는 종이책들이 더 소중하다.


책을 샀다거나, 빌렸다거나 하는 얘기를 하면 대단하게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다. 근 5년은 책을 읽은 적이 없다면서. 그렇지만 나는 탐독가나 애서가라는 멋진 이름 근처에는 갈 수 없는, 그저 영화 보듯 끌리는 이야기를 찾아보는 사람일 뿐이다. 재미없는 내용은 더 듣지 못하는 아이처럼, 중간에 그만두는 책도 무수하다. 넷플릭스 찜목록은 가득 차 있지만 정작 재생하는 건 얼마 되지 않는 것처럼, 읽어보고 싶은 책은 많지만 실제로 펼치는 책은 아주 적다.


다독가는 아니라도 서점에는 정기적으로 가줘야 하는 법이다. 주로 대형서점을 다녔는데 최근에는 독립출판물이 있는 책방도 종종 놀러 간다. 같이 갈만한 친구가 생겼는데, 함께 건강식-공원-서점을 갈 때면 이런 완벽한 데이트 코스가 어디 있냐며 즐거워한다. 그런 취향의 이성친구가 있다면 서로 소개해주자 말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없었고 매번 둘이 다닌다. 서점에서 한 권씩 사 오다 보면 완독리스트보다는 사놓고 안 읽은 책 리스트가 더 빠르게 느는 형국인데, 내 집중력보다는 어릴 적부터 책 읽는 환경이었다거나 부모님께 추천받은 책을 읽는 중이라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란 탓을 하는 편이다.


언제부터 책을 좋아했을까. 엄마가 '너는 어릴 때 늘 책을 놓지 않았다'라고 하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고 나서 이거나, 베스트셀러를 꿰는 재미가 있던 영풍문고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부터였거나, 영화 [러브레터]의 도서관 장면을 보고 나서 사서를 로맨틱한 직업으로 여긴 후로부터 일지 모른다. 그런 기억들이 다 없었더라도 책에 무언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나는 독서보다는 책이 주는 느낌, 그리고 책구경을 좋아한다.


오늘은 <코엑스-리틀프레스> 행사로 책구경을 갔는데, 두 권만 사자고 다짐했지만 다섯 권과 챙겨 받은 각종 엽서들을 안고 돌아왔다. 두 권은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작가님들의 책인데, 흔한 말이지만 읽다 보면 따듯한 위로를 받는다. 나머지 세 권은 모두 마음 아프게 슬퍼 펼쳐본 그 자리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던 책들이다. 행사는 전반적으로 흥미로웠다. 고등학교 때 만든 동물 캐릭터들의 세계관을 확장해 소설을 썼다는 작가님, 퇴사를 저지르기 전 읽었던 13권의 책에 관해 쓴 작가님, 지난 연애 경험을 엮어 책 한 권을 만들어 낸 작가님. 책 바로 뒤에 작가가 서 있어 버리는 재미있고 부담스러운 경험이었다.

 

책마다 추억이 담기는 게 좋다. 오늘 산 책들에는 글쓰기 선생님의 '계속 쓰세요!' 손 사인과, 작가들의 부끄러운 듯 책을 자랑하던 모습, 돌아오는 길에 비에 젖지 않도록 책가방을 안고 돌아다녔던 기억들이 함께 책장에 꽂혔다.



2023.05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도 애정하는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