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에 관하여
문장에는 힘이 있었다. 두 달 전, 쉼표 찍고 다음 장(章)으로 넘어가 명랑하게 살고 싶다고 쓴 뒤로 나는 꽤 즐겁게 지낸다. 더 이상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다. 지금 가진 소중한 것들과 오래도록 같이하고 싶을 뿐이다. 글쓰기도, 바이올린도, 사람들도. 그렇게 밝은 글을 써내보려 했지만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고, ‘부끄러운 글을 쓰고 싶다’는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작가님의 말에 용기를 얻어, 누군가 읽어줄 글에 지난 이야기를 꺼내본다.
후회와 우울은 원래가 일기의 단골 주제다. 누구나 일기에 기록된 대로 내내 지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밝은 것들은 주로 SNS 게시글에, 친구들과의 수다 안에 있고 어두운 것만 글로 남겼을 뿐이다. 무슨 사건이랄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유대감 없는 가정이긴 했지만 평범하게 자랐다. 우울함이 편하고 쉬운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였을 뿐이다.
실제로는 글을 쓰는 대신 울었는데, 더 어쩔 줄 모르게 되면 공책을 폈다. 마음과 상황을 쏟아내고 그게 무엇인지 마주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기록된 감정은 주로 자기혐오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는 허무함이었다. 그려둔 ‘멋진 인간’의 모습과는 다른 나를 두고 좌절했다. 머릿속엔 온통 나에 대한 생각이면서, 나를 잘 돌보지는 못했다. 글의 끝에는 늘 너 이래서는 안 돼, 나아져야 해.
쓸 때에는 본심을 그대로 담아내려 애썼다. 감정을 오역이나 의역 없이 적어냈다고 느껴지는 글들을 마침내 만나게 되면, 문자로 남긴 것에 대한 희열과 동시에 그 내용에 또 내가 싫었다. 지긋지긋했다.
20 대 초반의 어느 여름방학 때, 나는 몇 달째 지속되는 두통으로 엄마와 종합병원을 찾았다. 각종 검사를 해보았으나 이상은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3 층으로 가라는 말에 방문했던 정신의학과에서 요즘 힘든 일이 있냐, 따위의 질문을 듣게 되었다. 나는 엄마를 바로 옆에 세워두고, 엄마 아빠가 늘 싸운다면서 펑펑 울었고 집에 가는 길 내내도 그치지 못했다. 그건 옛날 일이고 그 당시 나의 스트레스라 하면 차라리 가스라이팅 하던 남자친구였는데 뜬금없이. 한숨 쉬던 엄마는 말했다. '넌 어릴 때부터 예민했어’. 얼마간 항우울제를 먹었고, 복학하고 얼마 후 두통은 사라졌다.
2-3 년 전 어느 시절에는 숨이 차고 잠을 잘 수 없었다. 갈비뼈 아래까지 닿아야 하는 숨이 쇄골을 넘어가지 못하고 목에서만 맴돌았다. 들이마신 공기를 아래로 더 밀어 넣기 위해 하던 것을 멈추고 숨을 쉬는 데에 집중했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징그러워 쳐다보기 힘든 문양들이 눈꺼풀 아래 펼쳐졌다. 어떤 시각 공포증 같은 거였을까, 그러나 무늬는 하루도 같지 않고 매일 달랐고 너무나 선명해서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알약 말고는 도움이 안 되던 병원 두세 군데를 가봤었고, 제대로 된 상담을 받기에는 당시 나는 돈과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증상은 거의 사라졌다.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살고 싶었고 돌아간다면 19살, 20살, 22살, 24살, 25살, 28살... 후회는 떨어지지 않는 짙은 그림자였다. 잘 살아보겠다고 했던 말들과 행동들은, 전부 거짓말 같아 도리어 나를 아프게 했다. 몇 년째 반복되는 후회와 자책의 내용의 일기 앞에서 나는 무너졌다. 계속 들여다보고 적지 않으면 금세 까먹어버리고 흘러가는 대로 살게 되었지만, 그렇게 사는 것도 똑바로 마주하는 것도 모두 괴로워지면 나는 또다시 헤맸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내 인생의 상하 곡선 중 꽤 높은 곳에 있을 때 만나 나를 좋아해 준 사람들. 그래프의 아래를 향해 내려가면 나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못했다. 가라앉아 있는 모습은 보여줄 수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아, 표현하던 나는 그를 배신했고, 난 정말 나쁜 사람이라며 자책했다.
이런 생각은 누구에게도 솔직하기 어려워 어떤 관계도 마냥 편해본 적이 없다. 내 글은 늘 비공개였던 거다. 그래도 이렇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쉼표 찍을 수 있게 된 이유라 한다면, 혼자 앉아 일기 쓰던 시간들이 있어서다. 그 덕분에 이제는 같은 우울함을 적는 게 정말이지 지겨워진 거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내 세상에 갇혀있다가도 신기하도록 나와 비슷한 글과 노래 가사를 만나서 위로받는 순간들. 어제는 안 깨고 잘 잤냐고 물어봐 주는 오랜 친구와 가끔 별일 없는지 물어봐 주는 엄마.
유치하지만 까만 잉크로 팔뚝에 明朗을 새겨 넣었다. 나는 이전 장을 들출 때도 명랑하게, 가볍고 관대한 마음으로 추억 찾듯 그렇게 되돌아볼 거다. 그리고 이번 장에서는 세상의 이야기도, 밝기도 어둡기도 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써보고 싶다.
202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