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관하여
커가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친구들의 부모님은 단둘이 외식도, 영화관람도, 심지어 여행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엄마아빠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니다. 아예 없지는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밥 먹다 시작된 싸움이 집에서도 이어졌다거나, 같이 간 식당에서 싸운 후 각각 집에 돌아왔다던 일화를 한참 뒤에 듣기는 했다.
더 천천히 알게 된 또 하나는 가족에 대한 마음이 그다지 애틋하지 않은 이들이 드라마 안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이 사실은 조금 놀라웠는데 겉으로는 좀처럼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연 없는 집구석이 없는 법인데 모두들 이제는 극복했다는 듯, 주위엔 화목하고 애틋한 형태의 가족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기야 쉽게 묻지도 드러내지도 못하는 것이 가정사인데 나도 누군가에게는 ‘나와 다른’ 화목한 가족의 둘째 딸이겠지.
엄마와 아빠에 대한 원망이나 서운함 같은 것들을 읊어보자면 밤도 지새울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에이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대답을 듣고 민망해지는 몇 번의 사회적 경험으로, 아직 그런 밤을 보낸 적은 없다. 열심히 키워주신 부모님을 두고 어떻게, 철부지나 패륜아로 몰릴 수는 없다. 좋아하는 몇몇 친구들은 가족의 ‘기역’만 나와도 소중한 마음에 어김없이 눈이 그렁그렁 해진다. 그러나 친구네라고 특별할까. 어쩌면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고, 흔한 말처럼 부모가 된 후에야 또르르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아버지의 췌장암 진단에 흘렸던 내 눈물의 의미가 그 생의 고달픔을 감히 짐작한 안쓰러움과 미안함이었다고, 아빠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거나 하는 마음은 아니었다고, 이렇게 적어 남겨두는 것은 안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지만 쓰지 않는 것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어릴 적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말하면서 세 딸을 서로 데려가라 하눈 둥의 싸움을 때에도, 나에게는 그게 홧김에 한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으니 우리 모두 각자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을 뿐이다. 그땐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내 마음은 이렇다.
아주 어릴 때부터 봐온 엄마와 아빠의 서로를 향한 비난과 거짓말들, 나는 그 모습을 닮을까 늘 두려웠다. 지금도 결혼한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옆 공공도서관에서 육아서 몇 권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 나는 엄마와는 다른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마음에 담은 몇 구절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있다. 스스로 키운 가족의 무게에 결혼이니 육아니 하는 것들은 점점 더 신기루 같은 일이 되어간다. 솔직히 십 대 때의 그런 마음들은 사춘기와 겹쳐 좀 지나쳤던 것이 사실이다. 나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싶었을까, 유난했던 시절이다.
성인이 되어 집에서 떠나 살게 되면서는 여유가 좀 생겨, 엄마와 아빠를 부모다움의 틀에서 좀 더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여자와 남자, 한 인간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엄마아빠를 미워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고, 머리가 커가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도 했다. 눈치도 많이 보고 집안일도 가장 많이 했던 건 사실이지만, 나는 전형적인 둘째, 가장 덜 챙김 받는 샌드위치 속재료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엄마는 나를 가장 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고, 언젠가 언니와 동생도 그렇게 느낀다고 했었다. 아빠에게도 그나마 덜 묵뚝뚝한 딸은 나였을 텐데, 딸들과 대화할 줄 몰랐던 아빠 옆에 가 일부러 정치뉴스 따위를 화제로 꺼내던 나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들어가 공부해서 ‘화이트칼라’가 되라는 같은 레퍼토리였지만.
그런 나는 언니와 동생은 아마도 모르고 있는 엄마와 아빠의 과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어느 소설의 주인공이었다면 불쌍하고 애틋해했을 둘의 인생.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이야기들.
오해를 방지하고자 한다. 두 사람은 지금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고, 엄마는 아픈 아빠 먹으라고 우리 어릴 때 보다 더 자주 요리하고 지내신다. 시간 앞에서 많은 것이 힘을 잃었고 분노와 원망도 그랬을 것이다.
분명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시작해 부모님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우리 집 천사 개 보리지만. 두 번째는 나의 지난 연애들이었지만, 세 번째는 퇴사를 앞둔 내 입사동기지만, 그래도 네 번째 떠오른 것은 가족이었다. 세상에 다양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글에도 분명 사랑이 담겨있다고 본다. 사랑과 이해를 담아 글을 적었다. ‘나’를 돌보는 법을 알기 어려운 시절을 살았고, 자식들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 몰랐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자주는 아니지만 이제는 전화로 사랑한다는 말도 한다. 서른이 넘어도 쿨해지지 못하고 옛날일을 담아두고, 혼자 떠나 가아끔 집에 오는 둘째 딸을 둔 우리 엄마아빠. 돌아가며 암에 걸리셨지만 다행히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는 우리 부모님. 지금보다 몇 도 더 따듯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까지 두 분이 건강하고 평안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202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