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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 Apr 27. 2020

나를 위해 사기로 결심했다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사회인이 되어 좋았던 건 타인을 위한 씀씀이 변화였다. 몇 백 원 차이로 아메리카노 기프티콘을 줄지 카페라떼 기프티콘을 보낼지 이제는 망설이지 않는다. 약속 장소를 정할 땐 가격보다 분위기와 맛을 먼저 따진다. 경제권이란 자유로운 잔고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자유로운 돈을 가져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용돈을 드리고 선물을 사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용돈과 선물에 기뻐했으며 고마운 목소리로 행복하다 말했다. 행복해하는 그들을 보니 좋았다.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 못지않다는 걸 배웠다. 사회초년생은 그녀가 얻은 경제권과 기쁨을 한껏 누렸다.


 저축도 시작했다. 언제 수익이 끊길지 몰랐던 과거에 비해 현재에는 수입이 꾸준하게 들어왔다. 예전만큼 지출하고도 여유자금이 생겼다. 특판 상품들을 검색해 가입하고 경제 용어를 공부했다. 돈이 주는 방어력과 안정감은 대단했다. 주변 사람들은 표정이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몇 년 후 미래도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었다. 잔고에 찍힌 숫자를 보면 뿌듯했다. 여유를 더 확실하게 누리고 싶었다. 잔고 숫자를 키우고 싶었다. 수입은 한정적인데 선물도 해야 하고 잔고도 늘려야 하니 졸라맬 허리띠는 나 하나였다. 먹고 싶은 걸 덜 먹고 사고 싶은 걸 덜 사며 아끼고 참았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다가오는 5월은 가정의 달이자 지인들의 경사가 겹친 달이다. 5월은 수입보다 지출이 큰 달이라서 이전에 여유 자본을 확보해둬야 한다. 5월을 앞둔 4월 말,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금액을 책정해보았다. 그런데 지난달에 계산을 잘못했는지 비상금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예상보다 선물 가격대가 높았다. 비상금으로 끝날 게 아니라 이번 달 생활비도 줄여야 할 판이었다. 동생에게 선물은 줘야겠고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하면 좋겠는데 나는 모르겠고. 적금 통장들은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고.

 

 고심 끝에 긴축재정에 돌입했다. 필요 금액을 확보하기 위해 이번 달은 참기로. 저번 달과 저저번 달도 참았지만 이번 달은 더 많이 참기로 했다. 그렇게 참고 지내는데 불쑥, 슬퍼졌다. 1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데 500원이 아까워서 1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샀기 때문이다. 1500원 아이스크림을 사러 편의점으로 갔는데 말이다. 이제  몇 만 원짜리 밥도 먹을 수 있고 십몇 만 원 선물도 살 수 있는데 나를 위해 고작 1500원도 쓰지 못하다니. 학창 시절 그렇게 먹고 싶었던 모 빵집 시나몬롤이 성인이 되어 보니 얼마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날처럼 어딘가 푹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스크림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지?


 그간 돈을 많이 모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애써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면 행복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무럭무럭 먹은 나는 정작 본인의 행복이 무엇인지 살피지 못했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저렴한 가격대로 타협하는 습관. 위시리스트를 가득 적어놓고 어느 항목도 지우지 못하는 자세. 사회인이 되기 전 혹은 더 이전부터 존재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습관에 옳고 그름을 논할 순 없다. 싸다고 해서 모두 질이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기쁘지 않았을 뿐이다. 타인이 행복해도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되고 미래를 위하더라도 현재를 소홀히 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었다. 타인이 느끼지 않길 바라는 감정은 나도 느껴선 안 되었다. 대리 행복과 담보 행복으론 현재 행복을 살 수 없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내 행복은 이게 아니야.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어젯밤 적금 하나를 깼다. 해지한 돈을 남김없이 쓰기로 했다. 단, 타인을 위한 물건 이어선 안 된다. 생필품이나 업무 용품도 안 된다.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뒷전으로 밀렸던 물건들만 사야 한다. 실은 위시리스트에서 가장 사고 싶었던 물건들, 나만을 위한 물건 말이다. 남은 돈이 생긴다면 절대 통장에 다시 넣지 않기로 했다. 적금 상품도 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만기 될 때까지 새 상품을 가입하지 않기로. 적절하게 거절하는 연습도 시작했다. 상대의 부탁과 바람이 의도되지 않더라도 내 상황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면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모습을 자책하는 자세부터 길러야겠지만.


 저축이 줄고 소비가 늘어나면 통장 잔고가 느린 속도로 자라 불안할지도 모르겠다. 자칫하다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본인들로 내가 불행해지지 않길 바란다. 미래의 나도 현재의 내가 불행하지 않길 바랄 것이다. 그러니 불안한 마음은 잠시 내려두려 한다. 도전엔 시행착오가 필요한 법이다. 그 끝이 행복이라면 해 볼 만하다.

 

나는 오늘 나를 위해 사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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