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동기 K가 3년 전 승진해서 팀장급이 된 이후에는 자동으로 존댓말이 나온다. 원래 나보다 세 살 많지만 정신연령이 비슷해서 서로 반말을 쓰던 사이다.
언제 오냐 (= 언제 한국 돌아와서 복직할 거니)
여름에 가려고요~
오기 싫지? 캐나다 공기는 좋아?
공기야... 두 말하면 입 아프죠 ㅎㅎ
원래 있던 팀으로 원대복귀?
뭐 걍 받아주는 곳에 가야죠
우리 팀으로 와
ㅋㅋㅋㅋㅋ 정말? (+배 잡고 박장대소하는 이모티콘)
그래, 이제 1월이지. 1월 중순 승진 인사가 끝나면 1월 말은 이동 인사가 시작된다. 승진 시즌까지는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만 이동 시즌에는 상황이 역전된다. 팀, 센터 정도의 10명 미만 작은 조직을 맡고 있는 관리자들은 부서원 스카웃에 총력을 다하는 시기다. 이때가 그들의 1년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하지 않기 때문에 "좀 괜찮은 사람 없어?" 라며 부하직원들에게 구인 미션을 주기도 하고, 본인들도 하루 종일 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승진하기 유리한 팀이나 워라밸로 소문난 팀에 똘똘한 부서원을 뺏기지 않기 위한 옥상 면담은 필수이며 신세한탄은 선택이다. 반면 직원들은 다른 부서를 기웃거리면서 지금 있는 곳과 저울질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고질적이며, 뒤숭숭한 시기다.
웃는 이모티콘을 날리면서 슬쩍 폰으로 회사웹에 들어가 K가 지금 어디 팀장인지 확인해 봤다. 음... 구조혁신 1... 자고로 조직명에 "혁신"자가 들어가면 쳐다도 보지 말라 했는데...
저 거기 가면 뭐 시킬 거예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 뻥이야)
ㅋㅋㅋㅋㅋ 몇 시 퇴근시켜 줄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 (= 뻥이야)
뻥치시네. 부장 되더니 뻥이 더 늘었어.
벌써 팀장 3년 차시네요. 이제 편할 만하니 상무달 때 되었네요^^
편하긴. 맨날 위로 아래로 눈치 보고 욕먹고 ㅠ ㅠ 다 내려놨다.
에이 무슨... 토닥토닥
K가 좀 변했다. 명문대를 나와 입사하자마자 비서실로 가서 승진도 빠르고 야망도 있었다. 저녁에 회사 앞 식당에 가면 늘 다른 테이블에서 만날 만큼 사교적이고 발이 넓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커서(본인 피셜) 속 감정을 겉으로 다 드러내던 단순함이 부럽기도 했던 사람이다. 소개팅 시켜줬더니 왜 이런 여자를 소개해주냐는 둥, 경조사비 대신 전달 부탁했더니 왜 자기 결혼식에 더 적게 했냐는 둥, 갑자기 투잡을 하겠다며 어디 강제 가입을 시키는 둥 투닥거리기도 했다.
10대 때 만난 친구는 언제 만나도 10대 같길래, 서른 언저리에 만난 동기도 영원히 그 나이에 머물 것 같더니 그렇지 않았다. 왠지 뭔가 뭉툭해진 느낌이다.
ㅎㅎ 그냥 사는 거지... 아 나도 너처럼 좀 쉬고 싶네.
난 그냥 돈 까먹고 있는 거지머. 팀장님은 그래도 많이 벌잖아.
많이 벌긴 ㅋㅋㅋ. 뻔히 알면서.
조직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힘든 건 안 겪어봐도 훤하다. 상사는 혼내고, 부하직원은 욕하고(내가 욕해봐서 안다). 연봉 상승액과 힘듦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여름에 연락할게요. 그 팀 가겠다는 뜻은 아니고... 갈데없으면 가고... 내 맘 알죠 ㅋㅋㅋ?
ㅎㅎㅎ 복직하기 싫지?
싫어도 해야지... 난 으른이니까? (+펭수가 우는 이모티콘)
나도 서른 언저리에는 옹졸한 야망(?)이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승진하거나 상이라도 받으면 축하잔을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때로는 심란할 때가 있지만 멘탈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다. 직장에서의 성취 말고도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꿈이 없어진 게 아니라 꿈이 조금 달라졌다.
어쩌면 직장으로 돌아가서 동기 팀장의 팀원으로 지낼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존심이 있지, 동기 밑에서 어떻게 구르냐" 했을지도. 그런데 지금은? Why not? 이왕이면 친한 사람 밑에서 구르는 게 낫지. 자존심이 없어진 게 아니라, 이게 왜 자존심이 상할 일인가.
저녁에는 새우전을 했다. 해동시킨 냉동새우에 밀가루와 계란물을 차례대로 입힌 후, 스텐팬에 약불로 구우면 간을 안 해도 참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