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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인 Feb 11. 2023

영어가 삶이 될 때

빵(0)개 국어 구사자의 단상


엄마들


웨어 아 유어 키-즈? Where are your keys?

마이 키즈 아 인 스쿨. My kids are in school.


조기유학맘인 K의 친구가 토론토 어디 정비소에 차 수리를 갔다가 정비사와 나눈 대화라고 한다. 수다를 떨다 이 얘기를 듣고는 뿜고 말았다. 내 영어도 별반 나을 거 없으면서. 말이란 늘 맥락 안에 있으므로 정비소에서는 자동차 열쇠가 먼저 연상되기 마련인데, 늘 자식이 삶의 중심에 있는 한국엄마들에게는 어딜 가도 애들이 맥락 안에 사나 보다.



자막 없는 세계는 김치 같은 것


한국에서는 한드에 철벽을 치고 미드만 봤다. 이왕 놀더라도 영어 표현 하나라도 픽업하자는 마음이었다. 캐나다에 온 후로는 '사방이 영어인데 왜 드라마까지 영어로 봐야 되나!!!' 며, 우영우, 재벌집, 글로리 등 화제작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이건 마치, 좀체 안 먹던 김치를 이제는 몇 킬로씩 배달받아먹는 식성의 변화와 비슷하다.


자막이 필요 없는 세계는 그 감칠맛이 중독적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호하고 불친절한 세계가 이내 명쾌하고 다정해진다. 그 세계에 사는 나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세계에서 나는 신분이 불확실한 이방인이다. 낯가림이 심하고 우유부단하고 어리바리하다. 반면 모국어 세계의 나는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세금을 내는 일등 시민이다. 호기심도 많고, 결단력과 추진력도 있는 편이다. 어쩌면 나는 자막 없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런 세계에서 당당했던 나를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영어 공부 하기 싫다.


대학생 때는 나름 치열하게 했다. 토익 공부도 열심히 했고, 돈 안 드는 어학연수를 하겠다고 미국에 인턴십도 다녀왔다. 그때 일종의 언어차별로 일자리를 잃을 뻔했었는데, 보스에게 따져서 더 좋은 자리로 옮겼던 적도 있다. 나는 이 일을 무용담처럼 포장하여 한국회사 취업 면접 때 사골 국물 우리듯 우려 합격을 닦달했다.


지금은 영어권 국가에서 사는데도 영어를 배울 모티브가 부족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째, 더 이상 영어로 내 상품성을 증명할 일이 없겠다는 예상이다. 이민은 내 팔자에 없을 거 같고, 한국의 내 직업은 영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기계 번역이 급속도로 발전 중이다. 딥러닝을 장착한 Google Translate이 지금도 나의 천군만마로 활약하고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처럼 일상에서 AI 통역사를 부릴 날도 지척에 온 것 같다. "친애하는 공정한 친구, ChatGPT 시대에 이런 얘기는 진부하다는 것을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 서글퍼진다. 영어를 벌써 놓아버릴 만큼 난 늙어버린 건가? 내 인생 이모작에 밀 심을 일은 없다고, 벼만 심겠다고 섣불리 선을 긋는 건 아닐까.



환갑 여인의 스페인어 독학기 


아들은 듀오링고로 1년째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다. 쓰임새가 더 높을 법한 중국어를 몇 번 권유해 봤지만 독일어나 러시아어를 가끔 간 볼뿐 아시아 쪽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아마도 먼 나라 언어 배우기를 밥벌이에 엮을 도구가 아니라 놀이처럼 즐기는 것 같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사물에도 성별이 있는 세계, 16진법과 20진법을 쓰는 세계, 때로는 자갈이 구르고 개가 짖는 발성의 세계*. 세계에서 부딪히다 보면 생각하는 방식도 계속 확장되는 게 느껴진다. 에세이집 <언어가 삶이 될 때>에서 김미소 작가는 '언어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라고 했다. 영어 하나라도 완벽해야지 하는 목표보다 여러 외국어를 힐끗 거리며 세계를 배수로 넓혀가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어를 배우면서 모국어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상당하다.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영어가 내 삶에 더 깊이 들어오고서야 한국어의 참맛과 가치를 깨닫고 매번 감탄한다. 한국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 정보 밀도가 높다 주장을 가족들과 종종 나눴는데, 어쩌면 이게 늘 효율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성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닐까도 싶다. (이후에 구글링을 하다가 상반되는 연구결과**를 찾기도 했지만, 수(數)를 다루는 표현에서는 우리가 나눈 생각이 맞다고 믿는다.)


지금은 비록 한국드라마에 집착할지언정, 내 인생에서 외국어 공부가 끝났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외국어의 교환가치는 떨어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사용가치는 남아 있다. 은퇴 후 남미 배낭여행을 꿈꾼다. 그전에 1년 정도 고되게 스페인어를 배울 것이다. 그때쯤 <환갑 여인의 스페인어 독학기>를 연재하면 어떨까.



* 미셸 투르니에가 <마왕>에서 독일어에 대해

** 언어의 상대적 효율성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즉, 더 빨리 말하거나 음절에 더 많은 의미를 담음으로써 대부분의 언어는 주어진 시간 동안 같은 양의 정보를 전달한다. 뇌가 시간당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나.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adv.aaw2594)


2년 전 세 달 배우고 접은 스페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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