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도착해서 일주일 만에 아이들은 등교를 시작했는데, 정작 남편의 대학 수업은 8월 중순 이후에나 개강을 해서 남편과 하루 종일 붙어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초반엔 은행이나 마트에 혼자 가는 것이 두려워서 함께하는 게 든든했지만, 낯설었던 환경들이 점점 익숙해지고 정말 말 그대로 화장실 갈 때 빼곤 온종일 붙어있다 보니 점점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함께 가던 도서관도 한 명이 가면 다른 한 명은 집에 있는다던지, 운동을 가면 한 시간 동안은 서로의 존재를 잊고 자기 운동에만 집중한다던지, 집에서도 방과 거실에 따로 있다가 식사 때만 만난다던지 하며 점점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UNC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진정한 나만의 시간이 생길 거라고 기대했지만, 비싼 주차요금 때문에 내가 운전해서 내려주고 주변 도서관이나 마트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데리러 가고 하다 보니 한국에서도 안 하던 라이딩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다들 뭔가를 배우고 돌아갈 텐데, 나는 일 년 내내 이렇게 집밥 하고 운전만 하다 돌아가는 건가?'
나도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져서 ESL 수업 과정을 본격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남편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김에 나도 수업을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UNC 부설 과정을 알아봤지만 J2비자를 위한 수업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있는 한두 개의 수업은 장소가 멀고 찾아가기 애매하거나 수업 커리큘럼이 너무 부실했다.
무료인 수업들을 알아보다가 근처 컬리지에서 들을 수 있는 ESL이 괜찮아 보여 레벨테스트를 신청하려고 하니 이미 한번 테스트가 끝났고 금요일의 추가 테스트가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금토일과 휴일인 월요일까지 해서 워싱턴에 다녀오려던 계획이었지만, 레벨테스트를 위해 출발 시간을 늦추고 레벨테스트를 보러 갔다.
요 몇 달 동안 아파트 계약서며 아이들 학교 공문, 보험약관, 자동차 계약서, 은행약관 등 정말 토 나올 정도의 영어 문서를 읽어댄 탓인지 레벨테스트는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토플 시험을 보듯 온 신경을 집중해서 풀고 제일 먼저 답안지를 제출했는데, 채점을 하던 감독관이 내 이름을 호명했다.
시험지를 가지고 나가서 벽에 붙은 화살표를 따라가면 나오는 사무실로 가보라고 해서 열심히 찾아갔더니 데스크에 앉은 담당 직원이 내 시험지를 보며 하는 말이, 나는 시험을 잘 봐서 무료 과정 수업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이런...
아니, 시험을 못 봐서 떨어지는 레벨테스트는 봤어도, 너무 잘 봐서 떨어지는 레테라니...
그럼 난 수업을 들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자기네 컬리지의 학생들을 위한 ESL과정이 따로 있는데, 그건 한 학기 과정이고 따로 수업료가 있는 유료 과정이라는 것이다.
무료 수업만 알아보다 유료 수업이라니 좀 아까워져서, '나는 읽고 쓰는 것만 잘한다. 알아듣는 건 겨우 조금 알아듣고 말하는 건 정말 못한다. 그러니까 무료 ESL 수업을 듣게 해 주면 안 되겠냐.' 고 부탁하자 담당자는, "여기 오는 한국인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 하지만 우리 학교 방침상 그건 안된다. 무료 ESL은 정말 간단한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한 이민자들을 위한 과정이다." 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결국 좀 생각해보고 신청하겠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와서 남편과 통화하며 복도에 있었는데, 나 다음으로 들어간 (딱 봐도 한국 사람 같았던) 사람이 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난 영어 잘 못해요. 읽는 것만 좀 하는 거예요."
이런...... 텍스트에만 강한 한국인들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