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덕분에 일주일 정도는 마트에 안 가도 먹을거리 걱정 없이 따뜻한 집밥을 해 먹으며 안정적으로 정착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해 나갈 수 있었다.
바닥 생활에서 벗어나 임시 식탁과 책상이 생기니 왠지 가구를 구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이 사라졌다.
높이가 안 맞는 바 의자에 앉은 것 같은 불편함에 익숙해질 무렵, 결국 아마존에서 젤 저렴한 접이식 의자 두 개를 주문했다.
비록 식탁 가격에 맞먹는 허접한 의자였지만 그동안 불편했던 식사시간을 생각하니 적당한 높이와 얄팍한 쿠션 시트만으로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우리 가족의 식탁 세팅이 완성되었다.
미국 도착 첫날 구입한 매트리스를 한 방에 나란히 놓고 네 식구가 함께 잤는데 꽤나 괜찮았다.
8인치 메모리폼이었는데 스프링과 라텍스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이리저리 옮기며 사용하면 카펫 청소하기에도 용이할 것 같아 아예 침대 프레임은 구입을 안 하기로 했다.
물론 스프링과 라텍스의 단점도 두루 갖고 있긴 했지만, 일 년 내내 우리의 편안한 잠자리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최고의 장난감이 되었다.
돌 이후로 바로 잠자리 독립을 했던 아이들이라 엄마 아빠랑 같이 잔다는 게 불편할 법도 한데, 미국에서 가장 좋았던 게 뭐였냐는 질문에 '엄마 아빠랑 한 방에서 같이 잔 거요.'라고 대답할 정도로 함께 잠자는 시간을 너무 좋아했다.
그다음으로 필요했던 게 아이의 책상이었다.
아이들이 등교를 하면서 필연적으로 숙제가 생겼는데, 바닥에 엎드려 영어 숙제 같은 수학 숙제를 하는 아이를 보니 빨리 책상을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식탁이 생겼고, 식탁 겸 책상으로 사용하다 보니 책상 사려는 마음이 시들해지던 차에 중고로 올라온 이케아 책상을 발견했다.
이사를 앞둔 유학생 부부였는데, 책상 외에 2인용 소파도 같이 가져가겠냐고 제안해서 얼른 오케이 했다.
쿠션감이라고는 1도 없는 낡은 간이 소파였지만, 우리에겐 맨바닥에 앉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가구였다.
2인용 소파를 남편과 둘이 낑낑 거리며 차까지 옮긴 후, 행여 차에 흠집이 날세라 번쩍 들어 트렁크에 한 번에 올렸다.
1년 후에 다시 되팔 것을 생각하면 차에 단 하나의 흠집도 용납할 수 없기에 나온 괴력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10벌씩 챙겨간 옷들은 한 사람당 40벌, 네 명이니까 160벌 정도였는데, 드레스룸이 꽤 넓어서 옷걸이만 구입해 걸어두었다.
속옷이나 잠옷처럼 접어둬야 하는 옷들은 선반을 하나씩 지정해서 각자 정리하니, 드레스룸 자체가 가족의 공동 옷장이 되었다.
침대에 이어 옷장이나 서랍장도 사지 않게 돼서 예산이 또 남았다.
사실 가장 시급했던 것은 전등이었다.
방마다 전등이 달려있지 않아서 플로어 스탠드가 꼭 필요했고, 기본적으로 달려있는 조명들도 조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려면 스탠드가 추가적으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급한대로 플로어 스탠드를 구할 때까지 캠핑용 랜턴을 켜고 생활했다.
꼭 필요한 물품만 챙기며 짐을 줄이는 와중에도 가져왔던 것인데, 정말 정말 요긴하게 썼던 물건 중 하나다.
여행을 가거나 집에 정전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챙겼는데 충전용 배터리 기능도 있어서 여행 갈 때 항상 가방에 넣어 다녔고, 진짜로 정전이 된 적이 있었는데 엄청 유용하고 든든해서 챙겨온 내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다.
어쨌든 랜턴 덕(?)에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자 스탠드 구입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고, 어느새 어두운 조도에 적응이 돼서 플로어 스탠드 하나, 데스크 스탠드 하나만 중고로 구입했다.
중고거래를 하기 위해 네비를 켜고 동서남북 종횡무진하며 다녔더니 어느새 집 주변의 길들이 익숙해졌다.
어느 동네에 어떤 마트가 있는지, 도서관은 어디쯤에 있는지,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는 어딘지 금세 파악할 수 있어서 더 빨리 정서적으로도 안정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익숙한 것들이 하나 둘 늘어가니 두렵거나 불안한 감정이 점점 사라졌다.
하나하나 살림살이를 마련하며 여기저기 다닐 때는 마치 신혼살림을 장만하는 듯 한 기분도 들었다.
예쁜 새것들로 세트를 맞춰 살림을 마련했던 진짜 신혼 때는 미처 모르고 지나갔던 그런 풋풋한 감정들이었다.
사용감도 많고 잔뜩 낡은 물건들이었지만, 사진들을 보면 아직까지도 하나하나 어느 동네에 가서 어떤 얘기들을 나누고 가져온 것들이었는지 다 생각이 난다.
소꿉장난 같았던 우리들의 살림살이들을 미니멀리즘이라 추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