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락 Oct 04. 2022

메아이고투더배쓰룸?

미국에서 1년 살기

미국에서의 일 년을 위해 필요한 서류들 준비와 행정적인 절차나 일정들은 완벽하게 챙기면서 정작 아이들이 맞닥뜨리게 될 낯선 환경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여겼던 것 같다.

미국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것을 마치 이사 가는 동네의 새 학교에 전학 가듯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리딩게이트'라는 영어책 읽기 프로그램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해 왔던 첫째 아이는 양치질만큼이나 몸에 밴 습관 덕분에 어느 정도 영어에 익숙했다.

그래서 막연하게 '당장 말하는 건 안되더라도 5th grade 수업 정도의 영어 읽기 듣기엔 금방 적응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따로 영어 과외를 하거나 준비를 해 준 것이 없었다.

다행히 예상대로 수업을 듣고 이해하는 데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다만, elementary school의 가장 마지막 학년이자 middle school을 앞두고 있는 학년인지라 글쓰기의 양이 확 늘어나는 시기여서, 단순히 듣거나 읽는 수준을 넘어 글짓기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하는 단계는 아이에게 커다란 도전이었다.

기본적인 용어들 조차 영어로 다시 알아야 했기에, 영어 숙제가 돼버린 수학 숙제를 위해 아이는 파파고 번역기 돌리는 법을 터득했고 한글로도 채우기 힘든 A4 한 페이지를 영작해서 채우느라 끙끙 앓곤 했다.

한글로 먼저 독후감을 쓰고 그걸 영어로 영작해야 할지, 그냥 쉽고 짧은 영어로라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가야 할지 조차 혼란스러워했다.

그래서 가장 쉽고 자신 있는 과목은 '수학' 이 되었다.

한국에서 선행학습을 하지 않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의 수학 수준은 같은 반 아이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래서 초반에 수학용어들을 영어로 다시 익히느라 고생한 것 빼곤 따로 공부할 것 도 없이 수학 시간엔 아무런 스트레스가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건 담임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잘하는 것들을 각각 돋보이게 해서 자신감을 심어주려는 의도이셨는지, 매 시험 때마다 아이의 시험지로 정답풀이를 진행하고 다른 아이들의 시험지를 채점할 때도 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셔서 어느새 반 아이들이 'OO 이는 수학을 잘하는 친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아이는 스트레스는커녕 자존감이 충만한 상태로 학교생활을 즐기게 되었고 다른 과목 시간에도 조금씩 참여도가 높아졌다.


한국에서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온 둘째는 그동안 해왔던 공부라곤 영어 동요와 파닉스 듣기가 전부였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넋 나간 표정의 아이를 1st grade 교실에 들여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첫날, 스쿨버스에서 내리는 아이의 얼굴은 의외로 밝았다.

살짝 기대하며 "학교에서 재밌었니?"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그냥..."이라는 아리송한 답변만 할 뿐이었다.

적어도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울고 불고 하는 일은 없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별말 없이 등교하던 아이의 책가방에서 어느 날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을 발견했다.

메아이고투더배쓰룸


이게 뭐지? 메아이고......?

......?

아!

'May I go to the bathroom'


"이거 어떻게 쓴 거야?"

포스트잇을 내밀며 아이에게 물었다.

"응... 그냥... 화장실 가고 싶다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Aarna가 얘기하는 거 보고...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 같아서 까먹을까 봐 써놨어."

라며 아이는 수줍게 말했다.

알고 보니 이 학교는 한국처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쉬는 시간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업 중간중간에 화장실에 가고 싶은 사람은 선생님께 얘기하고 화장실에 다녀와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행여 화장실을 못 찾고 헤맬까 봐 등교 첫날 교실에서 화장실까지 함께 가 보면서 위치를 알려줬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알아서 잘 다녀왔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거의 묵언 수행을 하던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선생님께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같은 반 친구가 하는 말을 얼핏 듣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포스트잇에 한글로 또박또박 적어둔 것이었다.

순전히 귀에 들리는 대로, 그래서 '메이 아이'가 아니라 '메아이'.

왈칵 눈물이 났다.

아무리 담임선생님이 구글 번역 앱을 이용해서 과제나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을 숙지시켜주시긴 했지만, 대부분의 수업내용이나 친구들의 대화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홀로 버텨내야 했을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말이나 내색은 한 번도 하지 않고 밝은 얼굴로 스쿨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아이의 모습에서 그저 잘 적응했겠거니,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봐왔구나 하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아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렇구나... 알려주지 않은 것도 알아서 잘하고 너무 잘했네. 엄마보다 훨씬 용감하고 멋지다."


아이는 이날 저녁 그동안 자기가 알게 된 영어단어를 공책에 써서 보여주며 내내 뿌듯해했다.

반 아이들이 자기가 뭐만 하면 엄지 손가락을 보이며 "Good job!"이라고 얘기한다고 어이없는 듯 얘기했지만, 그게 얼마나 아이에게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지 느낄 수 있었다.

구글 번역기로 매번 챙겨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다정한 담임선생님과 무한 긍정의 에너지로 아이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는 착한 1학년 친구들을 만난 것 같아 너무 감사했다.

거기에 더해 아이는 자기만의 속도로 너무 잘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보다 적응이 빠르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수영장 있는 집에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