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집, 전기, 핸드폰, 와이파이, 은행, 운전면허, 중고차, 아이들 학교, 그리고 소소한 장보기 등을 끝내고 나니 비로소 여유가 생겼다.
문득 그동안 정신없고 분주한 우리 곁에서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고 있는 아이들이 너무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웠다.
한국에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출발하는 바람에 방학을 즐길 새도 없이 미국에서 새 학기가 시작된 데다가, 매일같이 집에 친구들을 데려와 놀다가 여기 와서는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눠본 적 도 없을 것 같은 둘째가 더 걱정되었다.
아이들이 아무 내색 없이 잘 지내는걸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게 미안했다.
그래서 주말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Museum of life and science(NC 생명과학 박물관)에 갔다.
어린이 박물관으로 유명하다는 것만 알고 별다른 정보 없이 갔는데 성인 21달러, 3세 이상 12세 이하의 아동은 16달러로 생각보다 입장료가 비쌌다.
연회원에 가입하면 일 년 동안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는 일종의 자유이용권이 있었는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까 싶어서 일단 오늘 하루 체험해 보고 나가면서 결정하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정보인데, ASTC Travel Passport Program에 가입된 회원은 이 박물관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ASTC(Associa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Centers) 연간회원에 가입하면 가입 박물관과 본인이 거주하는 곳으로부터 90마일 떨어진 ASTC 가입 박물관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과천과학관도 ASTC 가입기관이라 과천과학관 연간회원(회원비 5만 원)에 가입한 후 출국하면 1년간 북미 소재 ASTC 가입 박물관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미국에서 가입해도 되지만 거주지 인근의 뮤지엄 연간회원에 가입하면 그로부터 90 마일 이내의 박물관들은 무료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왕이면 과천과학관에서 가입하고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런 꿀정보를 몰랐던 우리는 할인을 받지 못했고 개장시간부터 폐장시간까지 하루종일 보내며 뽕을 뽑으리라 다짐했다.
박물관은 각종 곤충들과 작은 동물들의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는 곳부터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자연현상들을 직접 체험해 보고 그 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설들로 가득했다.
예를 들어 커다란 레일에 단풍씨앗 모형을 올려두고 손잡이를 열심히 돌려 꼭대기까지 올리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단풍씨앗이 어떻게 회전하며 떨어지는지를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다니며 자연스럽게 단풍씨앗의 원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 서로 번갈아가며 레일을 돌려주고 단풍씨앗을 잡으러 뛰어다니며 금세 친해졌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새롭고 재밌는 경험들이라 점점 비싼 입장료에 대해 수긍이 가기 시작했다.
아쉬웠던 건 먹을거리를 파는 곳이 너무 없었다.
도시락을 싸와서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니 아무 정보 없이 온 건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핫도그 하나로 간단히 허기만 해결하고 버티는 수밖에.
아침이라도 든든하게 밥을 먹고 온 게 다행이었다고 할까?
오전 내내 뛰어다닌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오후에도 내내 뛰어다녔다.
박물관 건물만 해도 여러 개였는데, 외부에는 공원을 가로지르는 작은 기차도 있었고(마치 서울대공원의 코끼리열차 같은) 거대한 숲 놀이터 같은 큰 규모의 체험공간들이 더 많았다.
지난 2주 동안 거의 실내생활만 하던 아이들은 정말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그동안 아이들이 영어로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던 나는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과 뭐라 뭐라 얘기하며 같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왜 아이들은 엄마 아빠 앞에서는 영어로 얘기하질 않는지...
그동안 학교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집에 돌아오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래도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하며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요즘 종이 접기에 한창 빠져있는 둘째는 "이런 건 집에서도 할 수 있지 않니?"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앉아 종이접기를 즐겼다.
하루종일 어린이박물관에서 보내며 아이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아이들의 속도에 맞춰 기다려주는 게 참 힘들었다.
내가 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은데도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부분에서 흥미와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이 넓은 박물관의 모든 체험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그다음단계로 계속 재촉했는데, 아이들에게는 중요한 게 따로 있었다.
아무리 내가 한 번만 해보라며 권해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뭐 저런 걸 하고 있나 싶은데 한참을 빠져있기도 했다.
스스로가 흥미를 느껴야 결국 재미를 느끼고 계속한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의 생각을 내려놓는 게 참 어렵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커다란 반원을 이리저리 돌려서 줌인 줌아웃 되는 구글지도로 우리나라를 찾아낸 아이들은 점점 확대해서 우리 집 찾기를 시작했다.
결국 항공뷰로 보이는 우리 집을 찾아낸 아이들은 눈앞에 보이는 우리 집 모습에 신기해하면서도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1년 동안 잘 있어. 우리 금방 갈게~"
폐장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도 아이들에겐 집에 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듯했다.
하루종일 아이들을 쫓아다니느라 지친 나는 얼른 집에 가서 눕고만 싶었다.
핫도그 외엔 먹은 것이 없어 배도 고프고 더 이상 박물관이 신기하지도 재밌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먼저 집에 가자는 이야기를 할 때까지 꾹 참았다.
"오늘이 미국에 와서 가장 신나는 날이에요!"
얘들아, 우리 미국에 온 지 이주밖에 안 지났거든?
그래... 너희가 즐겁다면 됐지 뭐.
앞으로도 계속 더욱 신나는 날들을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