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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락 Dec 05. 2023

도시락을 싸줄께

미국에서 1년 살기

미국에 있는 1년 동안 아이들의 학력을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 학교에 미국 학교의 재학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복잡한 내용을 영어로 대화해야 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가기 며칠 전부터 모의 대화문을 메모장에 적고 달달 외웠다.

아이들의 등록을 위해 학교에 처음 방문했던 날, 처음 들어보는 용어들을 못 알아듣고 당황했던 게 떠오르니 더욱 긴장되었다.

더군다나 남편이 등교하는 날이라 이번엔 아이들 학교에 나 혼자 다녀와야 했다. 

'에잇, 이왕 학교에 가는 거 아이들이랑 점심도 같이 먹고 와야지.'

아이들 학교는 점심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면 아이들과 함께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도시락을 싸가거나 카페테리아 메뉴를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어서, 아이들 급식이 어떤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어떻게 잘 적응은 하고 있는지 살짝 보고 올 겸 아이들에게 미리 얘기도 안 했다.

영어로 대화할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지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용기가 났다.



학교건물은 항상 잠겨있었는데, 벨을 눌러 인터폰을 통해 방문 목적을 말하면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통과해 바로 옆에 붙어있는 학교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이곳은 학교의 행정실이자 안쪽으로는 교장실도 있고 보건실도 붙어있어서 항상 학부모들과 아이들로 북적였다.

그래서 그런지 직원들은 항상 바쁘고 정신이 없어 보여서 괜히 말을 걸 때마다 더 긴장이 되었다.

다행히도 처음 학교 등록을 하러 왔을 때 한번 만났던 직원이 출근을 한 날이었다.

이미 나의 어리바리함과 미숙한 영어실력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왠지 더 천천히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며칠 사이에 나의 영어실력이 쫌 나아졌을까?

어쨌든 무사히 재학증명서를 신청하고 담임선생님을 통해 아이들 편으로 받기로 했다.

혹시 아이들과 점심을 같이 먹고 갈 수 있냐고 물으니 편성표에서 아이들의 점심시간을 확인해 주었다.

10분 뒤에 작은 아이반의 점심시간이 시작되니 방문자등록을 하고 카페테리아에 가서 기다리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방문자 등록을 위해 키오스크에 줄을 서서 앞사람들이 등록하는 걸 유심히 봤다.

일단 웹캠으로 얼굴사진을 찍고 간단한 인적사항을 입력하면 방문자 스티커가 출력되었다.

마치 머그샷처럼 찍힌 어색한 사진의 출입증을 가슴에 붙이고 카페테리아로 갔다.



테이블을 닦고 있는 분께 아이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왔다고 말하니 아이반의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보조선생님인 줄 알았는데, 자원봉사하는 학부모 같았다. 

학교등록 첫날 멋모르고 PTA(Parent-Teacher Association)에 가입한 후로 거의 매주 참여를 독려하는 이메일을 받고 있었다.

PTA는 일종의 학부모회로 학교에서 학부모들의 자원봉사로 이뤄지는 활동들이 굉장히 많았다.

아직 선뜻 참여할 용기는 안 나지만 점심시간 봉사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12시 40분, 아이반의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왠지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옆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Surprise!"

"엄마 왜 왔어요?"

"같이 점심 먹으려고 왔지~"

"그래도 돼요?"

"그럼~ 언제든 와도 된데."



한국에선 상상도 못 했던 일이고 더욱이 낯선 학교에서 엄마를 만나니 얼떨떨한 듯했다.

같이 메뉴를 고르는 내내 울음을 꾹 참으며 친구들을 소개해주는 모습을 보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우리가 고른 메뉴는 치킨버거였는데, 한입 먹어보고 정말 놀랐다.

채소라고는 양상추는커녕 그 흔한 피클 한조각도 안 들어 있는 데다가 퍽퍽한 닭가슴살로 만든 패티에 빵은 차갑고 눅눅했다.

딱 봐도 맛없어 보이는 노란 사과는 퍼석퍼석하고 당도가 하나도 안 느껴졌다.

'와, 애들 점심이 이렇다고?'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 오는 것 같았다.

도시락으로 뭘 싸 오나 궁금해서 한번 둘러봤는데, 의외로 학교 식단이나 도시락이나 별다를 게 없었다.

아이들이 싸온 건 잼 바른 식빵에 스낵이나 포도나 사과 같은 과일 정도?

이렇게 부실한 점심을 먹고 4시까지 버티다니.

앞으로 절대 귀찮다고 생각하지 말고 점심 도시락을 꼭 싸줘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안정됐는지 아이가 웃어 보였다.

"엄마가 학교에 오니까 좋다."

곳곳에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엄마들이 보였다.

한국에서는 급식모니터링이라는 명목으로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만 학부모가 학교 식당에 방문할 수가 있었는데, 이 학교는 언제라도 방문자 등록만 하면 아이와 함께 식사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학부모의 방문에 엄청나게 오픈마인드인 것도 신기했지만, 이렇게 허접한 식단을 자신 있게 공개하는 것이 더 신기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식단이 점심으로 아이들에게 제공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학교가 엄청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

그냥 이정도는 기본인가 보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둘째를 올려 보내고 조금 있으니 첫째 아이의 점심시간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지 처음엔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나를 알아보고는 오히려 시선을 피하는 첫째의 반응이 재밌었다.

둘째처럼 눈물 그렁그렁한 감동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는 척도 안 해주다니.

오히려 옆의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툭툭 치며 너희 엄마 왔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첫째가 고른 메뉴는 정말 맛없어 보이는 다 식은 피자와 너겟이었다.

그동안 군말 없이 이런 학교 급식을 먹고 다녔던 아이들이 고맙고, 도시락 싸가고 싶다는 얘기에 살짝 귀찮아했던 게 너무 미안했다.

애틋한 마음에 가까이 가서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아이는 손사래 치며 얼른 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뭐지, 이 감동파괴는? 엄마가 창피하니? 


너...... 벌써 사춘기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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