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집 앞 스포츠센터에는 1층부터 3층까지 높이의 거대한 클라이밍 벽이 있었다.
처음 본 순간 '아이들이 진짜 좋아하겠다'는 생각에 YMCA가 아닌 이곳을 등록한 이유이기도 했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들은 보자마자 환호했고, 조금은 겁내지 않을까? 란 생각이 무색하게도 방문 첫날부터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클라이밍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안전요원이 근무하는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있었다.
보통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이 많이 이용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평일 오후엔 아이들로 북적였다.
첫 시작은 좀 여유롭게 하고 싶어서 그나마 좀 한가한 일요일 아침에 아이들을 데려갔다.
주일 아침이라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스포츠센터에 가장 사람이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볼더링을 연습할 수 있는 낮은 벽도 있었지만 아이들의 관심을 끈 건 단연 거대한 직벽이었다.
처음 착용해 보는 안전장비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안전요원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며 리드를 거는 방법까지 배우고 바로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밑에서 보기만 해도 아찔한데, 거침없이 쭉쭉 올라가는 아이의 모습이 놀라웠다.
'쟤가 저렇게 겁이 없었나?'
오르는 속도만 보면 금방이라도 천장까지 닿을 듯하던 아이는 2층높이에 다다르자 점점 속도를 줄였다.
벽에 매달려 있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땅과 멀어질수록 그 높이에 압도되어 겁이 나는 것 같았다.
결국 더 이상 오르기를 포기하고 줄을 타고 내려오는 아이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처음인데 벌써 2층까지 올라갔어! 진짜 대단하다. 엄마는 무서워서 못할 것 같아."
"별로 무섭지 않아요. 또 해봐도 돼요?"
방금 전까지 줄에 매달려 아래쪽은 내려다보지도 못하던 녀석이 땅에 내려오고 나니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동생 차례가 지나면 다시 도전해 보기로 하고 둘째의 등반이 시작되었다.
오빠가 거침없이 오르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둘째 아이도 꽤나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래도 한 번 해봤다고 아래에서 이것저것 훈수 두는 오빠의 말에 따라 다음 홀드를 잡아가며 열심히 올랐다.
둘째 아이 역시 어느 정도 오르고 나니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하는지, 2층높이 정도에 가까워지자 그만두고 내려왔다.
다른 사람이 등반할 땐 지켜보며 쉬다가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다시 올라가며,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오르기를 반복했다.
부부가 회원등록을 하면 아이들의 이용요금이 무료이기 때문에 클라이밍 외에도 운동기구나 농구장, 수영장, 그리고 샤워실까지 이용할 수 있었는데,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클라이밍 만으로도 본전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클라이밍장이 붐빌 때, 바로 옆에 붙어있는 농구장은 비어있을 때가 많았다.
일반 농구공 외에도 여성용이나 아이들용이 따로 있어서 아이들이 더 쉽게 슛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어떤 날은 슛연습만 하다가 팔이 아파 정작 클라이밍은 못하고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클라이밍이던 농구던 아이들이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모습이 우리에겐 낯설기만 했다.
또래 친구들보다 작고 왜소한 첫째 아이는 팀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치원이나 초등 1학년때, 반 아이들이 다 참여하니까 자연스레 시작했던 축구팀 활동도 오래 못 가 그만두었다.
'혹시 학교에서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치이고 있나?' 하는 걱정에 담임선생님께 여쭤보면 아이 성향 자체가 차분하고 정적인 것 일 뿐 교우관계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아이와의 대화에서 종종 체육시간에 축구를 잘하지 못해서 무시받을 때도 있고 체격차이로 은근한 괴롭힘을 받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는 점점 아이들이 축구할 때 참여하지 않게 되었고, 농구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자아이들의 활동과는 달리, 이 아이는 책을 읽거나 보드게임을 하는 그런 정적인 활동들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농구공을 잡고 미친 듯이 슛을 날리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정말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정말 재미가 없어서였을까?
잘해야 한다는 아이들의 질책에 점점 자신감이 없어져서 그냥 그만둬버린 건 아니었을까?
지금 이 순간 아이에게 농구는 공이 골대에 들어갈 때까지 그저 계속 던져보는 재밌는 공놀이였다.
'잘해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에서 벗어나 그저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던지는 게 너무너무 재밌기만 한 놀이였다.
점점 뻐근해지는 팔을 연신 두들기면서도 '다시 한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며 공을 던지는 아이의 얼굴엔 너무나 다양한 감정이 보였다.
재밌고, 신나고, 아쉽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고 싶은 것.
미국에 와서야 농구공을 처음으로 잡아본 아이가 운동은 재밌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