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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락 Dec 07. 2023

영어책은 그림 읽기부터

미국에서 1년 살기

아이들이 등교를 시작한 첫날, 멀뚱히 교실에 앉아있는 둘째 아이를 보니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졌다.

'역시 한국에서 영어를 조금이라도 공부시키고 와야 했어.'

지금이라도 집에서 영어책을 읽어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루라도 빨리 도서관에서 영어책을 잔뜩 빌려오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습득력이 빠른 시기이니 금세 아이의 입에서 영어가 술술 나올 것만 같았다.


구글로 미리 집을 찾아볼 때 도서관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 도서관까지는 차로 10분 정도 걸렸는데 생각보다 크고 이용시간도 한국보다 훨씬 길었다.



안내데스크에 가서 회원등록을 마치고 한 바퀴 둘러보니 아이들 책이 정말 많았다.

연령별로 나뉘어 있어서 수준이나 내용이 다양하고 표지나 삽화들도 다 너무 예뻤다.

그동안 한국에서 아이들이 봤던 영어동화책은 교육용으로 엄청나게 판매된 옥스퍼드 리딩트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책들이 전부였다.

학교에서 리딩게이트라는 온라인 영어책 읽기를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그것도 ort의 느낌과 별 다르지 않아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거나 재밌어하진 않았다.

영어동화책은 그저 학습을 위해 읽어야 하는 거였고, 그림이 취향에 맞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만 고르는 건 무리였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책들을 마음껏 골라 볼 수 있다니 너무 행복했다.

과연 아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지는 미지수지만.



바로 다음 날, 남편을 데리러 가는 길에 좀 일찍 출발해서 아이들과 함께 UNC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들렸다.

캐리에 있는 도서관이 좀 더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느낌이라면 채플힐에 있는 도서관은 뭔가 좀 더 도심지로 나온 듯한 세련된 느낌이랄까? 훨씬 규모가 크고 책도 두 배는 더 많은 것 같았다.

아이들은 처음엔 새로운 장소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어린이 열람실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 그림이 진짜 예쁘지?"

"와, 내가 좋아하는 토끼다. 진짜 이쁘다."

"그렇지? 한번 읽어볼까?"

"나 영어 못하는데?"

"그냥 그림만 봐도 돼. 한번 봐볼래?"

"아니."


둘째 아이는 영어책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린 아기들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재미있게 반납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상자였는데, 거기에 꽂혀서는 책을 읽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5학년인 첫째 녀석도 별다를 건 없었다.

워낙 책 읽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라 내심 기대를 했건만, 책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둘째 아이가 책정리에 빠져 있는 걸 보더니 그 옆에 앉아 유아용 교구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영어책이 많은데 이러고 시간을 보낸다고? 진심이야?

마치 뷔페에 와서 미소국에 밥만 말아먹고는 배부르다고 하는 아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책을 읽으라고 한다고 읽을 것 같지도 않아서 마음을 접고 그냥 내가 읽고 싶은 책이나 읽다 가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껍지 않고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고른 청소년 도서였는데, 생각보다 술술 읽혀서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을 유아용 교구에 빠져있던 아이들은 엄마가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는 걸 보고는 금방 집에 갈 것 같지 않았는지, 결국 도서관을 다시 빙빙 돌며 책을 한두 권 골라와서 내 옆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둘째나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첫째나 똑같이 유아용 그림책을 골라왔기 때문에 사실 읽는다기보다는 그림만 넘겨보는 수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제 시작이지.'



그 후로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트에 다녀오자고 데리고 나와서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렸다.

처음엔 책을 고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겨우 골라온 책도 안 읽고 그냥 반납하기 일쑤였는데, 조금씩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학교에서도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나자 도서관의 다른 책들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첫째 아이는 판타지 모험류의 소설에 빠졌고, 둘째 아이는  'bunny'를 검색해서 나온 책 들 중 토끼그림이 예쁜 책들만 골라 읽었다.

덕분에 나는 도서관에 있는 토끼 관련 책이나 제목에 토끼가 들어간 책이란 책의 표지는 다 본 것 같다.

토끼그림이 예뻐서 빌렸던 책이 재밌으면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빌려오게 되었고, 마음에 드는 시리즈는 전권을 한꺼번에 빌려와서 쌓아놓고 읽기도 했다.

도서관이 평일 늦게까지 운영되기 때문에 아이들이 방과 후에 여유롭게 올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고, 실제로 저녁시간엔 퇴근한 후에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빠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아이들이 도서관 책을 열심히 빌리기 시작한 데에는 바코드 찍기도 한 몫 했다.

사실 별거 아닌데도 아이들은 서로 바코드를 찍겠다고 더 열심히 책을 골라왔다.

공평하게 딱 반으로 나눠서 너는 이만큼 찍어 나는 이만큼 찍을게 하기도 하고, 한 명이 바코드 쪽으로 돌려 책을 건네주면 다른 한 명이 리더기를 갖다 댈 정도로 아이들은 바코드 찍기에 진심이었다.

결국 장바구니가 찢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을 골라온 적도 있어서 나중에는 각자 10권 이내로 권수를 제한하기도 했다.

어찌 됐던 영어책 빌려오기의 장벽을 확 낮춰준 일등공신이었다.



빌려온 책들은 따로 책꽂이가 없어서 벽 한쪽에 가지런히 쌓아두고 읽은 것과 읽을 것을 구분해 두었다.

TV도 없고 한국에서 다운로드해 온 영화들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책을 더 많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야 해, 책은 재밌어, 책을 읽으면 좋아'라고 얘기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책 보다 재밌는 게 없을 때,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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