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1년 동안 우리가 살 지역인 NC(노스캐롤라이나)의 Cary(캐리)는 우리나라의 제주도 같은 기후이다.
사계절을 대비해서 짐을 꾸려야 한다는 것은 여름 수영복부터 겨울 패딩까지 모두 챙겨가야 한다는 얘기다.
'미리 짐을 부치지 말고 최대한 미니멀한 1년을 보내고 오자.'는 일념 하에 수하물 8개와 카시트 1개, 기내용 캐리어 4개와 배낭 4개로 우리 넷의 짐을 제한했다.
덕분에 수하물 8개의 무게를 맞추느라 출발 전날 밤을 꼴딱 새웠다.
이 가방에서 저 가방으로 옮기고, 담았다가 빼고, 가지고 가려던 것들의 반도 못 담은 채 트렁크를 닫아야 했다.
네 명의 옷은 아이템 상관없이 계절별로 열개씩만.
말이 열 개지 티셔츠, 블라우스, 카디건, 바지, 치마만 해도 벌써 다섯 개다.
생활용품들은 '정말 정말 없으면 안 되는데 사기엔 아까운 것'을 기준 삼아 가지고 갈 것들을 결정했다.
이렇게 줄이고 줄여서 짐을 싸면서도 수하물 8개 중 2개는 식재료들로 채웠다.
"미국엔 한인마트도 많다는데 가서 사면 되지 가뜩이나 챙길 것도 많은데 먹을 것을 가져가나?"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처음으로 긴 시간 한국을 떠나 생활하려니 왠지 챙겨가야 할 것 같은 욕심에 이것저것 담다 보니 너무 많아진 감도 없지 않다.
(후에 '마트 이용기' 편에 이야기하겠지만, 웬만한 건 미국에서 다 구할 수 있긴 하다.)
수하물 검사 때 정체모를 가루나 액체 같은 건 그냥 폐기해버리기도 한다는 얘기를 듣고 검역을 위해 영어로 이름표도 붙여야 했다.
예를 들어 고춧가루는 red pepper powder, 멸치는 anchovy, 참기름은 sesame oil.
오전 8시 비행기라 미리 예약해 둔 밴을 이용해서 5시쯤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 많은 짐들이 다 실릴까 걱정했는데, 경험 많은 기사님이 뛰어난 쌓기 실력으로 차량 한 대에 빼곡하게 채워 무사히 출발할 수 있었다.
탑승 수속과 대기, 긴 비행과 입국심사, 그리고 또 대기 후 환승.
거의 20시간 만에 Cary(캐리) 근처의 Durham(더럼) 공항에 도착했는데, 미리 신청해둔 공항 픽업 서비스로 20분 정도 거리의 우리 집으로 이동 후 짐을 내려놓자마자 다시 30분 거리의 코스트코로 향했다.
공항 픽업 서비스에는 포함되지 않은 사항이라 추가적으로 팁을 후하게 드리고 가능했던 일이었다.
(호텔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아파트에 들어가서 생활하려면 얼마를 더 지불하더라도 꼭 했어야 할 일이었고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도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빛의 속도로 마트를 돌며 매트리스와 베개, 쌀, 냄비세트, 일회용 그릇(접시, 컵), 휴지, 생수, 우유, 시리얼 등 당장 생활하는데 필요한 기본 생필품들을 샀다. 커다란 스테이크 몇 덩이와 간식거리까지.
내 평생 코스트코에서 단시간에 그렇게 큰돈을 쓴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현금으로.
아파트에 돌아와 짐은 내팽개치고 새로 산 냄비에 밥을 해서 스테이크와 김치만으로 저녁을 먹었다.
김장김치를 6kg이나 챙겨갔는데, 짐을 쌀 때는 '괜히 미련하게 김치까지 들고 가는 것 아냐?'라고 생각했었지만, 도착 첫날 따뜻한 밥에 얹어 먹은 김치는 48시간의 이동으로 지치고 불안정한 몸과 마음에 최고의 안정을 주었다.
출발 전날 밤 수하물 8개의 무게를 맞춰 짐을 싸느라 밤을 꼴딱 새우고 공항에서의 대기시간과 경유 비행기까지, 그리고 초스피드 쇼핑까지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버틴 나는 이 든든한 식사 후 새 매트리스에 누워 다음날 아침까지 완벽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미국 도착 이틀 만에 밤낮이 뒤바뀐 시차 적응은 완벽하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