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중고차를 산다는 건
미국에서 1년 살기
미국에서 사는데 가장 필요한 건 뭘까?
집? 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그다음은 단연 자동차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1년 동안 살게 된 캐리(Cary) 근처엔 '동부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첨단 산업단지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TP)'가 있다.
그래서 인구의 유입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곳이고, 신축 아파트 공사장이 동네마다 있을 정도로 신도시의 느낌이 많이 났다.
하지만,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드넓은 옥수수밭을 만날 수 있고 복잡한 도시보다는 한적한 주거단지에 가까워서 지하철은커녕 버스 노선도 많지 않다.
'집 근처 편의점'이라는 개념은 아예 없고 아이들 학교도, 마트도, 도서관도, 심지어 운동하러 갈 때 도 모두 차를 이용한다.
게다가 우리는 아이들 방학 때마다 미국의 동서남북을 찍고 오는 여행을 할 계획이기에 장거리 운전에도 무리가 없는 튼튼하고 상태가 좋은 차를 사야 했다.
하지만 예산은 넉넉하지 않았고, 1년 타려고 새 차를 사기엔 너무 부담스럽고, 나중에 되팔고 올 생각까지 한다면 무난하게 인기가 많은 차를 중고로 구입해야 했다.
그래서 결국 정한 것이 '오디세이'였다.
아무리 중고차라도 일본차를 사는 게 꺼려졌지만, 나중에 되팔 것을 생각하면 가장 감가상각이 덜 한 것이 '오디세이'나 '시에나'라는 게 유경험자들의 조언이었다.
아이들을 태우거나 여행용, 장보기 용으로 가장 부담 없고 만만한 차, 그게 오디세이라는 것이다.
일단 차종을 정하고 나니 매물을 찾아보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원래는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중고차를 구하는 게 가장 쉬울 것 같아 한국에 있을 때부터 여러 매물들을 살펴봤다.
메일을 통해 사진도 받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봤지만 적당한 중고차를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차는 가격이 3천 불 밖에 안 했는데 연식이 오래되고 주행거리도 거의 14만 마일이었다.
처음엔 마일과 킬로미터의 차이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14만 킬로에 3천 불이면 타가다 버리고 와도 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14만 마일을 킬로미터로 환산해보니... 22만이 넘었다.
그 차로는 여행을 다니다간 길에서 견인차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너무나도 저렴했던 그 차는 뒤로하고 그다음 매물도, 그다음 매물도 매번 거래가 무산되었다.
출국날짜는 가까워지고 마음에 드는 매물은 없고, 결국 미국에 가서 중고차를 구입하기로 했다.
우리가 미국에 도착해서 3일 만에 중고차를 계약했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그도 그럴 것이 짧은 영어로 어버버 하는 우리가 새 차도 아니고 중고차를 샀다고?
그것도 제대로 된 중고차를? 중고차 시장의 날고 기는 세일즈맨들을 상대로?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의 비장의 무기는 '정착 서비스'였다.
정착 서비스는 RTP에 있는 한국인 이삿짐센터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거였는데, 한인 카페의 다수가 이미 이용을 해서 여러 후기들도 있었다.
도와주는 서비스 항목에 따라 요금이 달라지는데, 우리가 이용했던 건
1. 계약한 아파트 열쇠 미리 받아주기 (입국 한 날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2. 도착한 날 공항에 마중 나와서 같이 코스트코 다녀오기 (당장 일주일 동안 필요한 생필품 구매를 위해)
3. 아이들 학교 등록을 위해 교육청에 같이 가주기 (아이들 학교 관련 업무는 착오 없이 진행하고 싶어서)
4. 중고차 매물 보러 같이 가서 통역해주기 (정말 막막해서)였다.
우리와 함께 교육청에 갔었던 직원과 다시 만나, 아침 일찍부터 우리가 찍어 둔 4개의 매물을 시승해 보러 부지런히 이동했다.
처음에 방문한 곳은 자동차 딜러샵들이 모여있는 지역의 작은 규모의 가게 두 곳이었는데, 영화에서나 보던 중고차 샵을 실제로 보니 기분이 묘했다.
여권과 비자, 국제 운전면허증, 그리고 UNC 학생 등록증이 있으면 미국 운전면허증을 따기 전이라도 시승을 할 수 있었다.
다만, 계약은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에 자동차보험을 가입하고 나서야 가능하다.
너무나 막막하고 잔뜩 긴장해 있었는데 시승해보라며 선뜻 자동차 키를 건네주니 얼떨떨했다.
딜러가 조수석에 같이 타고 나가길 원하냐고 물어봤는데, 우린 이미 5명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우리끼리 다녀오겠다고 하고 주변 도로를 한 바퀴 돌고 오는 식으로 시승을 했다.
처음 운전해 보는 차종에, 초행길에, 영어로 계속 뭐라 뭐라 지시하는 내비게이션에, 완전 멘붕상태로 운전에 초 집중한 남편의 모습에 우린 모두 긴장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처음 시승을 했을 땐 '이렇게 타보고 뭘 알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 두 번째 차, 세 번째 차를 타면 탈 수록 승차감이나 차 상태의 차이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네 번째 매물은 혼다 대리점에 있는 차였다.
미국은 각 자동차 대리점에서 새 차 계약 외에 중고차 계약도 다루는 것이 특이했다.
주차장 가득 주차된 중고차들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 양재에 있는 중고차 시장 같았다.
하지만 대리점이라고 해서 좀 더 저렴하거나 상태가 좋은 차들이 있는 건 아니었다.
시승할 때 차이가 있다면 딜러가 조수석에 앉아서 이것저것 설명해 줬던 것 정도다.
각 딜러샵들이 모여 있는 동네라고 해도 차로 몇십 분씩 이동해야 했기에 4개의 샵을 방문하고 나니 어느새 4시가 되었다.
아침 9시에 나와서 점심시간을 빼더라도 6시간을 돌아다니며 시승을 했던 것이다.
딱히 마음에 드는 차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중 하나를 계약해야 하나 싶었는데, 잠시 쉬며 핸드폰으로 이리저리 검색해보던 남편이 최근 급부상하기 시작한 중고차 사이트가 있다며 딱 하나만 더 타보자고 제안했다.
도와주기로 한 직원도 원래는 반나절만 있기로 얘기했던 거였고 우리도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일 기운이 없었지만, 어떻게 해서든 괜찮은 차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그 직원에게는 얼마 더 성의표시를 하고 마지막 중고차 샵을 방문했다.
그 매장에 들어간 순간 왜 이 업체가 잘 나가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물은 기존 자동차 브랜드 회사들만큼 크고 세련되게 지었는데, 안내부터 시승, 계약까지 모든 직원들이 중고차만을 위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바로 옆에는 자동차 수리센터도 크게 있어서 중고차 구입 후 생기는 여러 문제들도 해결이 가능했다.
전담 딜러와 함께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오디세이를 타고 나간 시승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이 모든 긍정적 기분의 후광효과 때문이었을까?
가격은 오늘 우리가 시승했던 차들과 차이가 없는데, 연식이나 차의 상태가 훨씬 좋게 느껴졌다.
그 전 차량들을 운전하면서 느꼈던 엔진음은 거의 없고 내부 청소를 얼마나 깔끔하게 해 놨던지 새 차같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결국 우리 모두가 만족한 그 차는 이틀 뒤 우리 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