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년 살기
어차피 기다릴 거면 차라리 아침 일찍 가서 기다리고 1번으로 하고 오자며 8시에 오픈하는 DMV에 6시 40분 도착했다.
차로 30분 정도 거리의 시골에 있는 DMV였는데, 여러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보니 시내에 있는 DMV 직원들보단 훨씬 편한 분위기라는 평 때문이었다.
대신 엄청나게 느린 일 처리 때문에 한 사람당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니 아침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게 낫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안에 운전면허도, 렌터카 반납도 다 끝내버리자!"라며 우리 마음대로 아이들의 첫 등교를 하루 미뤘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오기엔 너무 애매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1등일 줄 알았는데, 더 일찍 온 차가 한 대 있었다.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는 우리가 주차하는 걸 보곤 부랴부랴 차에서 나와 맨 앞에 줄을 섰다.
두 번째로 줄을 서고 나니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하며 금세 줄이 늘어났다.
1번 할머니는 흑인이었는데 우리 보고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오호, 이것이 바로 스몰토크?'
'코리아'라고 했더니, 오~그러냐면서 자기 메이드는 베트남 사람이라고 했다.
엥? 그 얘기가 왜 나오나 싶었는데, 아마 아시아인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해서 자기가 아시아권에 친숙하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뭐... 나도 외국인은 다 똑같이 생긴 것 같고 남미 사람인지 아프리카 사람인지 구별 못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8시가 돼서 들어가니 창구가 달랑 2개였는데 서류 접수부터 주행시험 감독까지 한 사람이 모두 전담하는, 분업화는 1도 없는 원시적인 시스템이었다.
이러니 한 사람당 30분씩 걸릴 수밖에...
타이핑은 또 어찌나 느리던지 주토피아의 나무늘보가 떠올랐다.
한참만에 필요한 서류작성을 끝내고 이론시험을 보는데, 인터넷에서 봤던 족보대로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무사히 이론은 통과하고 드디어 주행시험을 볼 차례인데 문제가 생겼다.
렌터카 보험 서류에 남편의 이름만 올라와 있고 내 이름이 안 쓰여있어서 나는 우리 렌터카로 주행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 마이... 갓...
렌터카 빌릴 때 확인했었는데.
서류에 남편 이름만 써도 나까지 이 차로 운전면허 시험 볼 수 있는 거 맞냐고.
분명 맞다고 했는데... ㅜㅜ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은 건가?
아니면 그 사람들이 내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은 걸까?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린 오늘 안에 운전면허를 받아야 우리가 찜해 놓은 중고차를 살 수 있고, 그래야 오늘 안에 렌터카를 반납할 수 있으니까.
렌터카 비용을 하루라도 아끼겠다는 우리의 처절함이 통했던 걸까?
DMV는 워낙 일처리도 느리고 깐깐하기로 유명한데, 우리가 만난 담당자는 너무나도 친절하게 FAX 번호를 알려주며 여기로 서류를 받으라고 했다.
다른데 같았으면 얄짤없이 퇴짜 맞았을 텐데...
너무 고마워서 진짜 절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문제는 렌터카 회사에서 FAX로 서류를 보내줄 순 없고 직접 와서 다시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다녀와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오전 중에 오면 안 기다리고 시험 보게 해 줄게”라고 해서 남편만 주행시험을 마친 후 부리나케 근처 엔터프라이즈로 갔다.
그런데, 자기네 지점에서 계약한 게 아니라 서류에 내 이름을 따로 추가해 줄 수는 없다고 했다.
하아...... 영어가 짧아서 따질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차를 반납하고 내 이름으로 다시 렌트를 하기로 했다.
하루만 렌트하는 거라 30불 정도 더 비쌌지만, DMV에서 또 꼭두새벽부터 기다리는 것보단 낫겠지 싶어 그냥 진행했다.
서류를 가지고 DMV에 갔더니 아까보다 훨씬 더 길게 줄이 늘어 있었다.
'설마... 진짜 나부터 시험 보게 해 줄까?' 싶어 기나긴 줄을 비집고 들어가 사무실에 얼굴을 빼꼼~ 내밀었는데, "오, 이제 왔냐. 시험 보러 나가자."라고 얘기해 주었다. ㅜㅜ
렌터카에 시동을 건 후 주차장을 나서는 것부터 주행시험이 시작되었다.
조수석에 앉은 감독관이 가라는 대로 주행을 해서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오면 되는 거였는데, 시골이어서 그런지 다행히 차도 많지 않고 일 차선인 길이 많아서 운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너무 고맙고 친근한 건 좋은데 너무 친근한 나머지 주행시험 중에 "어디서 왔냐.", "왜 미국에 왔냐.", "운전은 얼마큼 해봤냐.", "UNC 앞에 햄버거집 가봤냐?" 계속 말을 시켜서 안 그래도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는 운전하랴 영어로 답하랴 더 헷갈려서 미치는 줄 알았다.
어쨌든, 결국 이런저런 사정도 다 봐주고 한 번에 합격시켜줬으니 미소와 함께 오만 종류의 땡큐를 연신 말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남편과 나는 모두 무사히 운전면허(Fleet 면허-임시면허)를 땄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우리가 간 바로 전날, 전산시스템 오류로 새벽같이 줄을 선 사람들이 시험도 못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고 한다.
시스템이 언제 정상화될지 모른다고 해서 오늘 아침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거였다.
원래는 한두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엄청 많이 기다리는데, 우리는 정말 행운이었던 거였다.
다행히 시스템은 어제 오전 중에 바로 정상화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걸 몰라서 많이 안 오고.
며칠 후에 정식 면허증으로 교체하러 간 남편의 말에 의하면 오늘과 같은 시간에 도착했는데, 이미 십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보면 정말 타이밍이 절묘했던 것이다.
후에 정식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땐 가까운 다른 DMV에 갔었는데, 분위기가 확연히 힐즈보로와 달랐다.
다른 DMV에는 서류 담당자와 주행시험 담당자가 각 파트별로 따로 나누어져 있고 대응도 사무적이었다.
심지어 줄을 관리하는 경찰(?) 같은 사람까지 있어서 기다리는 동안의 분위기조차 삭막했다.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려 간신히 접수했는데, 이미 정식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남편과 똑같은 서류를 준비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서류가 잘못됐다고 거절당했다.
짧은 영어로 어리바리하게 항변했으나 정확히 어떤 서류가 빠졌는지 설명도 없이 돌아가라는 대답만 들었다.
이런 게 말 안 통하는 타국에서의 설움인가 싶어 그다음 날 다시 힐즈보로 까지 가서 무사히 정식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았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힐즈보로는 한 사람 당 처리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지만, 과연 나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른 DMV에서도 그렇게 편의를 봐줬을까? 생각해 보면 No이다.
아니, N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