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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Nov 21. 2015

송림동의 크리스마스 3

청대문 집은 산 아래에 있었다. 산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언덕의 맨 위로부터는 마치 무언가에 쫓겨 올라가듯이 절박한 모양새의 살림집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차차 형편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쉽게 말하자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위로, 뭐라도 가진 자들은 아래로 향했다는 것이다.


잠깐 나의 것이 될 뻔도 하였던 청대문 집은 아래에 사는 걔 중에서도 가장 형편이 나은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왜  나처럼 쓸모없는 계집애를 원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국민학교를 다닐 나이가 되어 통학길에 오고 가던 길에서 청대문 집은 항상 굳게 닫혀있었다. 그 집에서는 그 흔한 싸움 한번 없었던지, 반질반질하게 푸른 페인트를 칠해놓은 무거운 나무문 안 쪽은 빈 집처럼 늘 조용했다.


사람이,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은 늘 사내의 고함소리, 징을 울리는 것처럼 괴로운 여인의 비명 소리, 쪽문 앞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는 노인네들의 한탄 소리와 살림살이가 와그르르 엎어지는 소리들이 어우러져 들려야 정상인 것이 이 산동네의 모습인데, 청대문 집은 그러지 않았다.

오며 가며 들은 얘기로 그 집은 부부가 단 둘이 산다고 하였다. 그 큰 집에서 두 사람만 산다니 조용할 만도 하겠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 집은 방 하나에 연탄 아궁이가 있는, 사람  한둘이 서 있으면 빼곡한 부엌 하나가 전부였고 그곳에서 여섯 식구가 부대끼며 살았다.


내가 입양될  뻔했던 얘기는 이미 그 동네에서 이사하고 한참 뒤에 들었기 때문에 그 조용한 대문을 보면서 특별히 어떤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다만, 그 고요가 부러웠다. 만약 내가 이 동네를 뜨기 전에 어머니로부터 청대문 집과 나와의 짧은 인연을 들었다면 나는 아마도 염치 불고하고 다시 나를 받아주면  안 되겠느냐고 그 대문을 두드렸을 지도 모른다.

좋은 것 먹고, 좋은 옷 입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집이 조용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곳은 마치 별세계와 같이 세상의 모든 구차한 소음에서부터 나를 완벽히 격리시켜 줄 수 있는 그런 곳일 거라고 어린 나는 매우 동경해마지 않았다.


나는 왜 파양 되었을까? 열흘만에.

나는 사실 좀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었던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저능아쯤 되었던 것 같다.

나는 4학년으로 올라갈 때까지 오른쪽 왼쪽을 구분하지 못하였고, 구구단도 떼지 못하였다. 아날로그 시계를 읽을 수 없어 항상 제때 시간을 맞추지 못하였다. 뭘 해도 느렸고, 의사표현도 명확하지 못했다. 입양 후 며칠 만에 청대문 집의 부부는 그것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왜 그들이 제 배 아파 낳은 것도 아닌 모자란 아이를 거둬들일 것인가.


부모님은 한동안 나의 존재를 어려워했다.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나를 대하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해 사람들이 취하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는 그것을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 나는 부모님을 원망할 수 없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더욱 나쁜 방법도 있었다. 아버지는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했을 뿐이고 어머니는 그마저도 못하였다. 교육받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나의 부모님들은 선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그들의 자식을 괴롭히면서 본인들의 고달픈 인생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멀쩡한 자식들에게도 언어로, 주먹으로 자신들의 울분을 푸는 부모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판자처럼 얇은 벽 너머의 가정사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병신 같은 년', '저런 것도 자식이라고', '너 같은 건 나가서 뒤져버려'


그리곤 당연한 수순처럼 무언가 깨지는 소리, 둔탁한 소음, 서러운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를 따랐다. 적어도 나의 부모님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강원도 인제의 산골에서 태어났다. 사방이 감자나 옥수수 밖에 없는 촌락이었다고 한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국민학교를 마치고 시내 목공소에서 허드레 일을 하면서 목수 일을 배우셨다. 후에 춘천에서 어머니와 중매결혼을 하여 도시로 가면 뭐라도  먹고살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거의 빈손과 다름없이 인천으로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도시에서 살아 세상 눈치가 밝았다. 다만 그녀는 딸 부잣집의 셋째 딸이었던 관계로, 끝내 국민학교 졸업장을 딸 수 있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영리한 여자였다. 나는 아직도 안타깝다. 배움이 일천한 그녀는 내가 가족이라는 관계를 떠나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도 매우 재기 넘치고 멋진 여성이었다.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 어머니는 굉장히 미인에 멋쟁이였다. 배우 김혜자의 젊은 시절과 닮은 모습인 사진 속의 어머니는 멋지게 부풀린 파마머리와 나팔바지, 그리고 맵시 있게 묶은 스카프를 하고 활짝 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암사자와 같이.

외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은 계모와 이복 형제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 써야 했던 투쟁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친부조차 자신의 편이 아니었음에 어머니는 일찌감치 헛된 싸움을 끝내고 홀로 집을 나서  독립했다.


그 당시만 해도 멀쩡히 가족이 있는 처녀가 집을 나와 혼자 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악바리처럼 온갖 잡 일,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모아 몇 년 사이 자그마한 점포 하나 차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았을 때, 친동생처럼 서로 의지하고 지내던 이가 그 돈을 들고 도망갔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거의 폐인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외할아버지는 재빨리 치워버리고자 이리저리 중매 자리를 알아보았고, 당시로 치면 노처녀 중의 노처녀, 집 나가서 뭘 하고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주홍글씨가 찍힌 여자에게 돌아올 선자리는 많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몇 안 되는 어머니의 선 상대자 중 하나였다. 그나마 나머지는 다 재혼 자리를 구하는 홀아비들 뿐이었다.

아버지가 당당한 총각으로서 이런 자리에 나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너무 가난하여, 가진 것이라곤 정말 몸뚱이  하나뿐이어서 제대로 된 처녀와는 절대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자이기 때문에 이른 나이부터 결혼을 서둘렀지만 그와 결혼해 줄 여자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하릴없이 나이만 먹다가 결국 '흠이 있는 처자'라도 나와 결혼만 해준다면 이란 마음으로 어머니와의 선자리에 나선 것이다.


두 사람은 절대 맞는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는 자기주장이 강하였고 쩨쩨하고 오종종한 짓을 참지 못하는 여장부였다. 성격이 불과 같았으며 두뇌회전이 빠르고 생활력이 강하였다.

반대로 아버지는 게으르고 낙천적이며 우유부단한 호인이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본인이 싫은 소리 듣는 것도 참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심하여 큰 소리로 대항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없이 도망만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둘 사이의 만남을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의 선자리로 서로의 성격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한시라도 빨리 떠나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를 택하였고 결혼하였다.


"차라리 결혼하지 말고  그때 다시 독립해서 혼자 살았으면 더 낫게 살았을 것 같은데요."


어느 밤, 소주 한 병을 꼬박 마시고 취해서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던 어머니에게 내가 말했다. 진심으로 나는 차라리 그녀가 혼자 살았더라면 더욱 아름답게 살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서 말했다. 그녀는 그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 실패를 거듭하여 계속 빈손으로 일어났더라도 그녀는 성공했을 것이다. 내 인생에 나는 아직도 어머니만큼 생활력이 강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래, 그랬을 지도 모르지. 지금보다야 더 잘 살 수 있었겠지. 나 혼자라면."


확신 없는 눈으로 그녀가 대꾸했다. 그렇다. 이 모든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미 그녀는 늙었고 힘이 다하였으며 인생의 나쁜 것이란 나쁜 것은 빼먹지 않고 감당했어야 했는데. 아름답고 힘이 넘쳤던 암사자는 인생이란 풍파속에 웅크리고 언젠가는 바람이 멈추기를 기다리다가 그대로 화석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불면을 치료하는 쏘주 한 병의 한숨 속에서나 옛이야기처럼 회자되었다. 금이가고 낡아버린 한 장의 흑백사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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