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바닥에서 끌어낸 첫 도구: 펜

by 모란비

처음부터 멋있게 시작한 사람은 없다.
정말 그렇다.
나는 그 말의 가장 밑바닥에서 출발했다.
몸도 마음도 기력이 빠져, 침대와 하나가 되어 버린 듯 살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이런 상태를 “번아웃”이라고 부르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내 하루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지치고, 말 한마디조차 힘겹게 느껴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취미를 가져봐요.”
“운동하면 좀 나아져요.”
사람들이 건네는 말들은 선의였지만, 그때의 내겐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느껴졌다.
힘이 있어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안정돼 있어야 그런 조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에너지의 ‘에’ 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끝만은 움직이고 싶었다.
말은 막혀 있고, 마음은 자꾸 가라앉는데, 손을 들어 펜을 잡는 일은 어쩐지 할 수 있었다.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그냥 펜을 잡았다.
큰 의미가 있어서도 아니고, ‘이걸로 뭔가 해봐야지’ 같은 멋있는 각오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조금씩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림은 그때, 내게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사람들과의 연결이 다 끊어진 것 같아도, 종이 위에 그어지는 얇은 선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나와 이어져 있었다. 그 작은 연결이 그 시절의 나를 가장 끝에서 붙잡아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틈만 나면 그렸다.
밥을 먹고, 아이들을 재우고, 직장에서 쉬는 시간 5분이 생기면 가장 먼저 손이 움직였다.
그림이 잘 되어서가 아니라, 그리는 동안만큼은 내 안의 불안과 웅얼거리던 어둠이 잠깐 멈추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 이 작은 움직임이 나를 살리고 있구나.”

아이를 키우고, 일하고, 집안을 책임지고, 그 속에서 나를 위한 무언가를 붙드는 건 때로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무책임한 일은 아닐까, 죄책감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사치가 나를 다시 세상 쪽으로 끌어올렸다.
내가 다시 서 있는 데 필요했던 건 큰 용기도, 대단한 결심도 아니었다.
그저 펜을 드는 힘 정도였다.

나는 엄마였고, 직장인이었고, 하루를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것’을 만들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 욕심 같은 마음 덕분에 수많은 작은 시작들이 생겼고, 그때는 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조각들이 지금 돌아보니 전부 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은 누구를 압도할 성공담도 아니고, 비밀 노하우 같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나처럼 막막하고, 불안했던 사람에게 “이렇게 시작해도 돼요”라고 조용히 건네고 싶은 말이다.

나는 우울이 깊어 펜을 들었고, 그 작은 시작 하나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 작은 시작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조금 느리고, 조금 흔들리더라도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당신도 이미 그 길 위에 있다.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의 첫 걸음은 이미 시작되었다.
작고 느린 한 걸음이지만, 그것이 바로 변화의 시작이다.
당신이 펜을 들고, 아이디어를 기록하고, 작은 시도를 반복하는 순간, 그 작은 움직임이 결국 당신을 만들어갈 것이다. 세상은 천천히 돌아가지만, 당신의 마음과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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