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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J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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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디 Jun 16. 2024

너에게 보낸다고 생각하며


J, 안녕.


작년 이맘 때 너는 나에게 아주 오랜만에, 느닷없이 DM을 보냈지. 너무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아 민망하다던 너는 힘들 때마다 내 블로그 글들을 훔쳐본다며 나를 아주 민망하게 만들었어. 조용하고 조촐한 블로그에 이따금씩 올리는 글을 네가 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어찌 됐건 위로를 받았다고 하니 부끄러운 한편 신기하고 고맙더라. 


나는 너한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물었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 너는 답했어.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나는 미국에서 남편이랑 살고 있어.” 


맞아, 분명 너랑 5년 전쯤 연락이 닿았을 때 네가 알려 준 사실이지. 근데 왜 나는 난생 처음 듣는 것처럼 그 말에 또 눈이 커졌는지 몰라. 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게 나한테는 여전히 다른 세계 얘기 같아서 그랬나 봐. 남자 둘이 거리에서 손을 잡는 게 죄처럼 여겨지고 느껴지는 이곳을 벗어나 살아본 적 없는 나에게는 말이야. 


너는 내게 말했어. 가끔 타향살이가 힘들어 한국에 들어갈까 싶다가도, 시선들 때문에 마음에 병이 생길 걸 생각하면 그 마음을 접고 만다고. 너는 나중에 한국 가면 보자며, 앞으로도 글 많이 써 달라며, 응원하겠다며 쪽지를 마무리했지. 


공교롭게도 너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그날 이후 나는 블로그에 글을 더 드문드문 올리기 시작했어. 네가 여전히 내 블로그를 종종 훔쳐 보고 달아난다면 누구보다 잘 알겠지? 너의 당부를 듣고도 게을러졌다는 게 조금 머쓱하긴 한데, 그렇다고 글쓰기를 멈춘 건 아니야. 사실 남몰래 꾸준히 쓰고 있었어.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과 다른 걸 쓰고 싶었어. 어떤 글인지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내가 게이임을 고백하는 글.


하루아침에 마음먹은 건 아니야. 성인이 되고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관심 갖게 된 뒤부터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차츰 쌓인 것 같아. 일로 써야 하는 글이든 블로그에 올리는 소소한 글이든, 뭐든 쓸 때마다 나는 생각했어. ‘분명 내 얘기를 쓴 게 맞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도 맞는데, 왜 거짓말만 늘어놓은 기분일까?’ 곰곰 그 이유를 헤아려 보았어, 몇 해에 걸쳐서. 내가 내린 답은 하나였어. 게이라는 사실을 티끌만치도 내보이지 않았다는 거.


꼭 쓰는 이가 글에 자신을 낱낱이 담고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건 차라리 불가능에 가깝지. 그런데 나는, 내가 나를 모른 체하고 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더라고. 나를 이루는 어떤 핵심은 싹 가린 채 곁가지 같은 이야기들을 한다는 생각이, 그런 게 도대체가 무슨 의미가 있나 의문이 들었던 것 같아. 

그런 생각을 자주 하며 지내던 와중에 너한테서 DM이 도착한 거야. 그날 결심했지. 이제 생각만 하지 말고, ‘그 얘기’를 쓰자고. 평생 감추고 살아온 이야기를, 나의 핵심과도 같은 이야기를, 이제 그만 써 보자고. 네가 내게 DM을 보낸 것처럼, 용기를 내 보자고. 


아무도 모르게 이런저런 글을 써 보았어. 유명한 드랙퀸이 된 고등학교 동창에 관한 이야기, 케이티 페리의 내한 공연과 테일러 스위프트의 콘서트 영화를 보고 와서 해방감에 날아갈 것 같았던 이야기, 애인이 초등학생 때 친척 어른에게 “너는 왜 그렇게 여자 같이 웃냐?”라는 말을 듣고부터 웃음을 참았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내게 덤덤하게 들려주는 애인을 바라보며 나도 조용히 비슷한 기억을 떠올린 이야기… 또 뭐가 더 있더라.


전부 완성을 못했어. 어쩐지 안 써지더라. 또 나는 이유를 고민해 봤지. ‘솔직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나를 압박하나? 여태껏 나를 괴롭힌 건 그냥 잘 쓰고 싶은 욕망뿐인데 내가 헛다리를 짚은 건가?’ 이것도 저것도 맞는 듯 아닌 듯한 와중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더라고. 안 써지는 게 당연하잖아. 살면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일기장에도 못 쓴 얘기를 쓰려는데 술술 써질 리가 없잖아. 


양재천이 훤히 내다보이는 카페에 왔어. 지난 주에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 얘기를 써 보려고. 그  친구가 만난 지 5분도 안 돼서 “여자 친구 있어?”라고 물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어, 있어.” 한 거야. 그러고는 성별만 바꿔서 애인 얘기를 술술 해 버렸거든. 근데 걔가 글쎄 자기가 사주에 꽂혔다며 사주 어플로 나랑 애인의 궁합을 봐 주는 거 있지. 애인의 성별을 여성으로 설정하고서. 둘이 성격이 잘 맞다느니, 너는 흙이 많고 물은 없는데 애인은 물이 좀 있어서 궁합이 나쁘지 않다느니, 결혼은 5년 뒤에 하면 좋을 것 같다느니… 아주 연설을 하더라고. 우습기도 미안하기도 했던 그날 얘기를 쓰고 있었는데, 역시나 중간에서 막히더라. 아직 나는 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는 걸까?

 

그러는 와중에 문득 네 생각이 났어. J한테 DM을 보낸다고 생각하고 써 보면 어떨까. 어쩐지 몸이랑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나더라.


그렇게 쓰다 보니 벌써 노트 다섯 쪽을 채워 버렸네. 애초에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홀가분하고 기분 좋다. 이건 ‘내가 게이'라고 또박또박 적고 완성한 첫 번째 글이거든.

 

나 마음먹었어. 앞으로 너를 수신인으로 두고 실패한 얘기들을 하나씩 써 보려고 해. 그 얘기들은 영영 너에게 부치지 않을 생각이지만, 또 모르지. 언젠가 불쑥 용기가 솟아서 미국에 있는 너에게 집 주소를 물을 날이 올지. 굳이 손으로 써 보낸 편지를 받고 나서 너는 어떤 기분일까. 블로그 글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이 글을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 올릴 생각이야. 괘씸하지? 수신인은 모르는 편지를 멋대로 다른 사람들한테 띄워 보낸다니, 응큼하게. 그래도 이해해 줘. 누군가, 만에 하나 누군가 이걸 읽고 불쑥 용감해진다면, 그건 꽤나 멋진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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