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명이 있는 시댁 가족 단체톡방에 문자가 드르륵드르륵 울려댄다.
『TV조선 유랑닥터 ** 마을 편』 방영일 *월*일 낮 12시 안내드리오니 많은 시청 바랍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장을 맡고 있는 시동생이 올린 문자였다. 한 방송사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고향마을이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니 평소에 조용하던 단톡방이 활기찼다.
"이제 우리 마을이 뜨네요."
"기대하겠습니다."
요즘은 워낙 매체가 다양해서 방송에 나오는 일이 많아지긴 했지만 3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자주 작은 마을이 티브이에 나오는 일이 있기란 드물기에 다들 들떠있을 만도 하다.
남편의 고향은 서울과의 기온차가 많게는 10도 이상 차이나는 고원지대이다. 밤하늘의 별들이 수없이 빛나는 곳. 내가 처음으로 개똥벌레를 봤고(도깨비불인 줄 알고 기절할 뻔) 횃불을 켜서 다슬기를 잡던 곳이다. 결혼하던 해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가 3번밖에 다니지 않았고, 솥뚜껑에 부침개를 부치던 곳이었다.
지금은 마을 가꾸기 사업을 해서 도로도 좋아졌고 멋진 카페도 생겨 커피 수혈도 가능하다. 오래전 살아온 날들의 풍경과 삶의 흔적들을 박물관으로 꾸며 놓고 어린 학생들이 견학 와서 아주 먼 옛날 농기구와 살림들을 구경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산골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 오염되지 않은 천혜의 환경이 있고 대부분 농사일로 먹고사는 일을 하고 있기에 순수한 마음과 관습들이 여전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시골을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는데 내 주위의 지인들은 대부분 놀라곤 한다.
'그렇게 먼 시댁을 왜 그리 자주 가세요?'
글쎄, 효자 남편 덕분에 자주(?) 가는 것인데 덩달아 나도 효부로 칭찬을 듣기도 한다. 그렇게 먼 산속 깊은 시골마을이 티브이에 나온다니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방영시간에 맞춰 시청을 했다.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고령의 할머니들이 계시는데 그중 한 분이 미스터트롯에 출연한 임영웅 가수의 엄청난 팬이셨다. 혼자서 지내시는 할머니는 적적함을 트로트로 달래셨고, 소싯적 재능을 가진 분이셨지만 등허리가 폴더폰처럼 접혀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도 힘든 지경이 되어버렸다. 살아서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한번 가보고 죽는 게 소원이셨던 할머니는 노인학교에서 한글을 배운 기억을 더듬어 정성스럽게 편지를 쓴 것이 당첨이 되었다.
'나는 임영웅이 편(팬)입니다. 죽기 전에 임영웅 콘서트 가보는 게 소원입니다. 의사 선생님 내 허리를 좀 고쳐 주셔서 내가 콘서트 가서 임영웅이 손 한번 잡아보고 죽게 해 주세요'
그 할머니를 찾으러 방송에서는 mc와 의사분이 마을에 도착해 여기저기 다니며 마을 구경하며 소개도 하고
만나는 사람과 인사하며 편지를 보낸 사연자를 찾는 것이었다. 마을 어르신 몇몇과 치료 후 좋아지신 할머니들은 춤을 추며 즐거워했고, 일상생활을 복귀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했다. 사연자의 할머니도 조만간 임영웅 콘서트에 가셔서 소원을 풀겠지.
문득 오래전 10대 중학생 시절이 생각났다. 연예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나는 최대 덕질이라고 하는 것이 김범룡 책받침을 사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같은 얼굴이 박힌 책받침을 노트밑에 넣고 필기를 하던 시절. 나의 최대 열정은 책받침이 전부였던 것일까. 내게는 그들이 주는 위안이나 안식이 없었던 것일까. 그 흔한 브로마이드 한 장 사지 않던 삭막한 사춘기 시절이 떠올랐다. 그런 무덤덤한 내가 20대가 된다고 없던 덕질이 생길까 싶을까 하면 또한 아니다. 결혼과 함께 육아와 살림 그리고 직장까지 내가 가질 취미생활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 같다. 30대가 되고 40대를 지나 지금 50대까지 나는 어떤 것에 마음을 스며들게 하는 것일까.
사람에게
동물에게
물건에
내 마음을 나누어주고 빠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잠시 글쓰기에 마음을 둔 적이 있었다. 그때는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걸 글로 치유한다는 생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물론 큰 도움이 되었고 기세를 몰아 신춘문예도 도전하며 희곡도 쓰기도 했다. 중요한 브런치 작가에도 당당히 합격해서 글을 써왔는데 이것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글태기가 오고, 흐지부지 게을러지면서 방치되었다.
얼마 전 뜻하지 않은 2박 3일 제주를 갔다. 그야말로 즉흥 여행. 흔히 하던 습관대로 관광지를 다니지 않고 이번 여행은 한 곳에서 머물며 나를 돌아보며 3일을 여유롭게 보냈다. 그러다 발견한 작은 서점.
서울대 생물학과 최재천 교수님의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라는 책을 집었다.
내가 평생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막 두드려 보았습니다.
그것은 방탕이 아니라 방황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음껏 방황하십시오.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매 순간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 단 한순간도 이것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악착같이 찾는 아름다운 방황을 하기 바랍니다. 그러한 방황의 끝에서 드디어 꿈의 끈을 잡으면 그것을 꽉 쥐고 앞만 보고 달리면 됩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찾는 것.
나는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찾지 않는 것이었다.
방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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