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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Sep 19. 2020

이태리타월

내 고향은 따뜻한 남쪽이다.

내가 태어나서  이십 년 가까이 지낼 때까지 눈 한번 내린 적이 없었으니 따뜻한 곳은 맞다.

사람들은 남쪽 지방이 따뜻하다고 하지만 바닷가의 겨울은 꼭 그렇지도 않다.

짜디짠 소금기가 섞인 거센 바람에 얼굴과 손등이 트는 것은 물론이고 얼굴도 구릿빛으로 변하게 한다.

차로 멀지 않은  시내에 목욕탕이 있었지만 4남매를 목욕탕에 데리고 다니기에는 상황도 어려웠을 것이고

목욕탕을 간다는 건 시골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보통의 가정들이 그렇듯 우리 집도 재래식 부엌이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지을 때였다.

장정 백명의 밥은 너끈히 해내고 남을 가마솥에 물을 끓인 다음, 큰 다라이(대야)에 나랑 여동생을 앉혀놓고 때를 밀어주곤 하셨다.

변변한 목욕용품도 없이 광목으로 때를 밀어주시던 엄마는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셨다.

사그라들 듯 말 듯 꺼지지 않는 장작불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지만 쉽게 꺼지지 않고 우리를 따뜻하게 해 줬다.

때를 밀 만한 목욕용품이 없었던 시절이고 연중행사로 목욕을 했던 터라 뜨거운 물에 들어가자마자 때는 슥슥 밀렸다.

동생과 나는 서로 상대방의 때가 많다고 입씨름을 할 때마다 엄마의 등짝 스매싱을 한 번씩 당하면서도 

삐죽 내민 혀로 서로 키득거리곤 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더 따뜻했다.

서울 사시는 고모와 사촌들이 놀러 왔고, 서울말 쓰는 하얗고 예쁜 사촌들이 신기하기도 해서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놀았다.

며칠 친정에서 머문 고모는 서울로 올라가시면서 우리 남매 중에 유일하게 나를 서울로 데리고 가셨다.

아마 말도 잘 듣고  남동생보다 짓궂은 짓을 덜 할 나를 간택하셨던 것 같다.

부러움과 질투로 둘러싸인  오빠와 동생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서울행 무궁화호 기차를 탔을 땐 흥분이 되어서 싸가지고 간 삶은 계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찍 해가 떨어진 서울역은 내가 자라오면서 봐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모여 있는 듯했다.

넓은 광장에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로 어디론가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눈 뜨고도 코 베어 가는 곳이 서울이라는데 정말 눈 한번 잘못 감았다간 고모와 사촌들을 잃을까 봐 조마조마 했다.

고모부의 자가용은 푹신했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과 높은 건물은 서울이 아니라 가보지도 못한 미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 들었다.

무사히 고모네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쉴 때였다.

나보다 두 살 위 언니가 싸한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내일 당장 목욕탕부터 데려가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시골(행정구역은 도시였지만.)에서 사촌이라고 왔는데 옷 입은 것도 촌스럽고 손등은 터 있고 같은 방에서 자야 한다는 게 거북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닌 게 아니라 다음날 고모는 나랑 동갑인 사촌과 함께 집 옆에 있는 우이탕에 데리고 갔다.

큰 굴뚝에서는 거뭇한 연기가 나오고 빨간색이 많이 흐릿해진 목욕탕 입간판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향긋한 비누냄새 같기도 하고 뽀송하게 삶은 빨래 냄새 같은 게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목욕탕을 가보는 게 참 신기했는데 샷시 문을 밀고 들어간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때를 밀어야 한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별다른 핑곗거리도 없고 사촌언니의 깔끔한 성격을 맞춰줘야 서울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고모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뿌연 안갯속으로 한 발 내디뎠다.

넓은 목욕탕 안에서 울리는 물소리와 간간히 들리는 세숫대야 부딪히는 소리

나는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일부러 못 본 척을 했지만 훈김 때문인지 사람들의 모습은 선녀탕의 선녀들 같았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던 나는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 때 고모가 던져준 이태리타월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손바닥에 끼워진 초록색 타월이 흐물거릴 때까지 나는 밀고 또 밀었다.

그날 목욕탕에서 제일 늦게 나온 사람은 나였다.

가벼워진 몸으로 옷을 입으니 고모가 요구르트를 건넸다.

서울에서 느껴본 첫맛이었다. 

목욕탕에서 선녀가 되어 나왔지만 여전히 사촌언니의 손은 잡지 못했다.


요즘엔 이태리타월을 쓸 일이 거의 없다. 매일 샤워를 하기에 때가 거의 없(는 것 같기도 하다;)다

목욕탕 한쪽 벽에 걸려있는 타월을 손바닥에 껴서 문질러 본다.

엄마가 손으로 밀어주던 그 감촉과 우이탕에서 이태리타월의 느낌을 생각해본다.

오래전 우이탕에서 상쾌함이 전해지는 가을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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