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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지 Jun 29. 2023

절박하게 찾아다니는 숲길

금요일 저녁이면 치맥을 하면서 '영화 한 편 때릴까?'라는 물음으로 여유롭게 보내거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차를 몰고 무작정 떠나고 싶기도 하다.  금요일 저녁은 직장인들의 최애 시간일 것이다.  지금까지 육아기간 3년을 제외하고 쉬어본 적이 없는 직장인이었던 나는 금요일 저녁은 더없이 소중하고 뭔가 즐기고 싶은 시간이기도 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맥주라도 한 캔 마시거나 보고 싶었던 영화라도 보고 싶은데, 잠을 설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두통이 찾아온다. 체질과 맞지 않은 음식과 수면 부족으로 컨디션이 나빠지는 날에는 머릿속 깊은 곳에서 시작된 편두통이 48시간 이어진다. 긴 고통과 함께 내 몸을 말아 동굴 속에 넣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빛을 차단하고 고통을 견디는 시간인 것이다. 어디도 갈 수 없고 어디에 있어도 행복하지 않은 날들이 되고야 만다.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20년 가까이 그곳에서 자라다 보니 내가 산이나 숲보다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무턱대고 말하고 다녔는데  바다가 아닌 숲이나 산, 또는 흙을 밟고 싶어 하고 더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다.  물론 바다도 너무 좋다. 부서지는 파도를 멍 때리고 바라보면 근심 걱정이 다 사리지니 말이다. 


내가 나무와 숲에 더욱더 끌리게 된 이유는 독서모임을 함께 하는 문우가 명리학에 관심이 많아 나도 전염이 된 적이 있었다. 재미 삼아 내 이름으로 사주풀이를 해본 적이 있는데 전문적인 풀이는 아니었지만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졌었다. 내게는 불이 많아 나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그래야 활활 잘 타오른다는 의미?) 나무가 아니라면 책이라도 가까이하라고 했던 말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책을 끼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진다. 매일 출퇴근하는 전철에서는 꼭 한 두쪽이라도 읽으려고 늘 무겁게 책을 넣고 다닌다.


내가 숲을 가까이하게 된 이유는 내 병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책을 끼고 있어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통이 시전을 하면 얼굴이 금세 빨갛게 열이 오르면서 토를 하고 식은땀이 난다. 그리곤 기운이 빠지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고야 만다. 가족들은 처음엔 안타까워하다가 "또 아파?"라고 하면 아픈 것이 죄인양 아무 말도 못 한다. 아프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매번 두통으로 즐거운 시간이 파투가 나거나 일상에 흐름이 깨지니 그럴 만도 하다.



처음엔 두통이 나에게 내린 알 수 없는 저주의 병인줄 알았다. 진통제로도 듣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마치 온 세상의 모든 고통을 혼자서 감당해야만 마법이 풀리는 저주가 걸린 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고통스러운 병이 내 딸이나 남편이 아프지 않고 내가 아프다니 차라리 내가 고통을 감수하자'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주기가 짧아지고 빈도수가 많아지니 더 이상 저주의 병이 아닌 의학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큰 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 통증을 잡아주는 약처방을 받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은 컨디션 조절이나 적당한 운동 매끼를 거르지 않는 식습관이 중요했다. 의학의 도움을 받은 그 이후는 48시간 고통스러움을 참았던 시간이 2~3시간으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두통은 내게 자주 오는 고통의 질병이다. 


주말아침이면 눈 뜨자마자 두통의 낌새를 먼저 살핀다. 요즘처럼 장마기간이 겹치는 저기압의 날씨가 지속될 때면 살얼음 판을 걷는 기분이다. 언제 내 머릿속 시한폭탄이 번개 치듯 촤르르 찌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눈 뜨자마자 창가로 가서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밤새 굳었던 근육들을 스트레칭해준다. 오늘은 별 탈없이 건강한 하루를 보내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빈다. 


언제까지 이렇게 두려움 속에 약만 끼고 살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 번은 토익시험을 보러 가는 딸을 시험장소에 데려다주고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간혹 주말에 수영을 하러 가긴 했지만 공원을 산책하는 건 처음이었다. 넓디넓은 숲길을 천천히 걸었다. 도심 한가운데 울창한 나무숲과 산책로가 잘 정비된 공원의 숲길은 내게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 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주변에 운동하는 사람들의 걸음보다 훨씬 느리게 걸었다. 중간중간 쉴 수 있는 벤치가 있었다. 적당한 그늘과 신선한 공기가 지끈거리던 두통을 가시게 만들었다. 조용히 숲길을 걸으며 호흡을 하니 조금씩 두통이 사라졌다. 


산을 오른다. 땀을 흘리며 천천히 올라간다. 산속 깊은 곳에서 내뿜는 향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나무의 기둥을 손으로 짚으며 가만히 그 나무의 기를 내 몸에 전하듯 눈을 감는다. 불어오는 바람과 숲향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느끼고 또다시 걸음을 뗀다. 꼭 정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좋다. 둘레길만 천천히 걷고 와도 두통이 사라진다. 심호흡은 수시로 한다. 입을 다물고 코로 4초 들이마시고 잠깐 2초를 참았다가 입으로 8초 정도 내뱉는 호흡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머릿속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낌뿐이 아니다. 실제로 두통이 사라졌다. 


혼자서 멀리 떠나지는 못해도 적당한 거리에 있는 숲길을 찾기 시작했다. 주로 집 근처의 왕릉을 가게 되는데, 문화유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니 만큼 음식물도 돗자리도 챙길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더욱 쾌적하고 산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고, 흙을 밟고( 맨발로 걷고 싶지만 매너 산책 유지) 나무의 기운을 느끼고, 숲에서 불어오는 강한 초록의 향기는 내 몸의 구석구석을 스며들어 순환시켜 준다. 한여름이 되다 보니 요즘 초록의 향기는 더욱 강하게 내뿜는다. 그곳에서 내 안의 쌓여있는 쓴 공기를 토해내고 강한 초록의 향기로 채워 넣는다.  맘 같아선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살아보고 싶지만 아직은 덜 절박한가 보다. 도심에서 적당히 편하게 살면서 자연이 주는 고마움만 누리고 싶으니 말이다. 



자연은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자연 속에서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고, 그 속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나무와 다를 바 없는 한 생명일 뿐이니 그 속에서 함께 공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절박하게 찾아가는 숲길에서 내 몸이 원하는 강한 향기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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