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대디, #워너 브롱크호스트
봄엔 스카프지!
지난 8일, 서촌에서 열린 워너 브롱크호스트의 전시를 찾았다. 오랜만에 글쓰기 모임 친구들과 함께한 나들이였다. 긴 겨울을 지나 처음으로 맞는 봄날의 외출이다. 겨울 동안 조금씩 불어난 내 몸처럼, 오랜만의 문화생활에 대한 기대감도 한껏 부풀었다.
내가 사는 지방에서 서울까지는 물리적인 거리보다도 심리적인 거리감이 더 크다. 어쩌다 큰맘 먹고 서울에 가기로 하면, 파워 J답게 계획부터 세운다. 그래야 해야 할 일들을 빠짐없이 챙기고 내려올 수 있으니까.
계획은 옷차림부터 시작된다. 전시라는 특별한 공간에 어울릴 법한 예쁜 옷을 입고 싶은 욕심과, 아직 바람이 매서운 봄날의 현실 사이에서 늘 고민한다.
문화생활이라는 고차원적 경험을 추구하다가, 일차원적인 일로 가득한 일상에 콧물, 기침, 피로로 지장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봄에 어울리는 스카프 한 장으로 포인트를 주면서도 보온을 챙기는 타협을 이뤄냈다. 다행히 친구들도 "다음에는 단체로 스카프를 맞춰오자"고 말해주어, 기분까지 좋아졌다.
그러게. 나는 문화생활을 핑계 삼아 친구들에게 공감받고, 감정을 나누고 싶어 한다. 이 단순한 진심이 통할 때 나는 참 행복하다.
"오전 입장 선호합니다"
이번 전시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나는 관람 전 단체 문자까지 받았다.
"입장 대기가 발생할 수 있으니 되도록 오전 시간대에 방문해 주세요."
와. 보통 전시장은 한적한 곳 아니었나?
높은 관심만큼 그의 작품이 궁금해져 발걸음이 빨라졌다.
유쾌하고 긍정적인 아티스트
서촌 골목길에 들어서서 코너를 한번 돌면, 하늘색 미니어처 수영장이 반겨주는 '그라운드시소' 전시장이 나온다.
오늘의 주인공, 워너 브롱크호스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올해 스물네 살.
"애기네. 애기" 들뜬 기대를 수다로 승화시키며, 전시장에 들어섰다.
지금은 주로 호주에서 활동하며, 미술계에서 가장 '핫'한 젊은 작가라는 설명을 들었다.
작품의 첫 감상은 선명한 색감(쨍한 색은 아니고, 따뜻하고 밝은 쪽)과 굵직한 질감이 강렬했다.
가구 디자인으로 출발한 이력답게, 회화에 가구용 페인트를 적용해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단순한 색채와 음영만으로, 배경을 이해하게 만드는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직관적이면서도 세련되게 느껴졌다. 그가 삶을 대하는 시선, 그대로를 캔버스에 옮겨둔 것 같았다.
전시장 벽면에 그의 시그니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세상은 하나의 캔버스이고, 우리는 그 안을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예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브롱크호스트는 유쾌하고 긍정적이며, 상상력이 가득한 아티스트였다. 역시 인기 있는데는 이유가 있다니까!
꼰대적 관점
브롱크호스트는 단지 ‘작품’으로만 주목받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SNS를 통해 작업 과정을 공유하고, 팔로워들과 일상을 나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134만 명. 그 안에는 가족, 스태프, 브랜드, 작업실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문득 "나는 꼰대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대개,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제대로 조명받는다는 것을 학습하며 자란 세대다. 그래서 그런지, 브롱크호스트가 '예술하는 인플루언서'처럼 느껴졌다.
AI가 이미지를 대신 그리고, 기술이 예술의 형식을 빠르게 바꾸어놓는 이 시대에, 그는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포함한 컨텐츠’를 선택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삶을 팬들과 나누고, 일상을 예술처럼 채색하는 이 청년에게서 나는 문득, 아이돌의 그림자를 보았다.
스티커 세대의 향수
굵은 붓질 위로 생동감 있게 배치된 미니어처들은 어린 시절 과자 상자 속이나, 스티커를 발견하던 기억을 소환했다. 유리창에 조심스레 스티커를 붙이던 그 시절의 손끝 감각이 떠올랐다. 물론 그의 미니어처는 붓으로 정성껏 그려낸 것이다.
골프, 서핑, 스키처럼 역동적인 스포츠 장면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골프채를 휘두르기 직전의 인물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곧 휘둘러질 것 같은 순간의 긴장감. 순간을 포착하는 그의 감각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몰입을 만들어냈다.
육아 대디와 3B
전시에서 가장 오래 시선이 머물렀던 건, 아기를 안고 작업하는 그의 사진이었다. 어릴 적 스티커를 모으던 소년은 이제 아이를 품에 안고 그 시절의 감성을 다시 그려내는 듯 했다. 곱상한 외모의 금발 청년이 아기띠를 맨 채 캔버스 앞에 서 있는 모습은 퍼포먼스 같기도 했고,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 같기도 했다.
따뜻한 공감이 밀려왔다. 육아 동지를 만난 기분이랄까.
‘아기를 키우면서 작업 하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기가 페인트 냄새로 아토피 생기는 건 아닐까?’
오만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의 작품이 유난히 밝고 경쾌한 것도, 아이가 주는 생명력 덕분이려나. 브롱크호스트에 메달린 아기가 걸음마를 하고 뛰고 노는 성장의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맘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낸시랭이 떠올랐다. 브롱크호스트의 품에 안긴 아기와 낸시랭의 어깨에 걸린 고양이 인형.
예술은 사람들의 관심이 떠나면 끝이라 했던가?
광고의 3B 전략. Beat, Baby, Beauty. 사람들의 본능적 관심을 끄는 3가지 요소, 동물, 아기, 미인...
영리한 친구잖아.
디저트 같은 굿즈
전시의 마지막 코스는 굿즈. 엽서, 마그넷, 키링, 티셔츠 등. 작품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색감과 캐릭터들로 일상 소품들을 디자인했다. 유년기의 스티커 북을 떠올리게 했던 장난스러운 감성이 굿즈와 잘 어울렸다. 역시 MZ력이 만렙인 작가다.
관람객을 위한 무료 미니어처 스티커와 엽서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라운드 시소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굿즈와 기념품을 안고 돌아가는 길, 나는 달콤한 디저트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맛이지만, 행복하게 기억되는 그런.
그리고 생각했다.
내 글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디저트 같은 기억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