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인 줄 알았던 길 | 영국 방송인의 인생 2막

인생의 지도는 직선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by morasafon

성공적인 삶은 어떤 모습일까. 촘촘하게 계획한 직선 도로 같은 모습일까. 혹시 정해진 선에서 이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동남아 한 국가에 정착해 30여 년째 살고 있는 영국인 Zaraor(가명)의 삶은 의도치 않았던 이탈과 우연의 연속이었다. 5년 전 은퇴하고 인생 2막을 살고 있다는 그는 찬찬히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던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온 커리어 전환

Zaraor은 자신의 인생이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고 운을 뗐다. 그의 첫 번째 커리어는 눈부셨다. 영국 방송국의 음악 프로모션팀에서 일하며 전 세계적인 팝스타들과 함께 TV 쇼를 만들었다. 비지스(Bee Gees),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 셰어(Cher) 같은 이름들을 언급할 때는 자부심으로 눈이 반짝였다. 밤마다 TV에 얼굴을 비추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시절. 그의 부모님은 작은 지방 도시 출신인 아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고 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완벽한 성공적인 삶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 그래프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급격히 꺾였다. 방송법이 바뀌면서, 팀 전체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그건 일종의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였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순간에 갑작스럽게 마주한 위기. 그의 표정에서 그날의 충격과 막막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가방 하나를 멘 채 무작정 세계 여행을 떠났다. 30여 개국을 떠돌다 지금의 삶의 터전인 동남아 한 국가에 다다랐다. 그는 그곳의 아름다운 섬과 해변에 매료되었고, 단기 비자가 끝날 무렵 그곳에 머물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민국에 가서 말했어요.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저는 방송 미디어 전문가입니다.’ 그러자 직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더군요. ‘이 나라 사람들의 일자리를 뺏을 수는 없습니다.’” 실망한 그에게 이민국 직원은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영어를 가르칠 수 있다면, 기꺼이 환영받을 겁니다.”


방송과 음악의 세계에서만 살던 그에게 ‘영어 교육’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길이었다. 인생의 방향은 때로 전혀 예상치 상황에서 정해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는 그 제안을 따라보기로 했다.


과거에 버려두었던 경험이 미래의 나를 구하다


운명은 그를 갓 문을 연 한 학교로 이끌었다. 면접관은 그의 음악적 배경에 주목하며 뜻밖의 ‘면접 과제’를 내주었다.


“우리 학교는 아직 교가가 없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교가를 한 곡 만들어줄 수 있나요?”


모든 악기를 처분하고 여행을 떠나왔던 그였지만, 다행히 무료 소프트웨어를 찾아 밤새 곡을 썼다. 그가 만든 노래에 학교는 열광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채용되었다. 과거의 지식과 경험이 예기치 않게 미래를 위한 기회가 된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무려 20여 년간 영어로 일하며 수천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그가 만든 교가는 매일 아침 학교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종종 어떤 경험이 당장 쓸모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그 가치를 판단하곤 한다. 당장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불필요하고 쓸모없다고. 하지만 Zaraor의 삶은 보여준다. 인생의 어떤 경험도 무의미하지 않으며, 정말 예기치 않은 순간에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구할 수 있다고.


화려한 도시의 불빛 대신, 작은 마을의 온기를 택하다

이제 그는 인구 40여 명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평화로운 해외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 매일 텃밭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 채소를 수확하고, 저녁이 되면 이웃집을 돌며 필요한 식재료를 나눈다. 모든 것이 무료이고, 모든 것이 공동체의 것이다. 젊은 시절, 도시의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느꼈던 성취감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충만함이 그의 삶을 채우고 있었다.


Zaraor 삶은 하나의 선 위에 정점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연주와 같았다. 해고는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고, 이민국에서의 거절은 다른 길로 이어지는 기회였다. 어쩌면 성공적인 삶이란, 잘 짜인 악보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만의 음악을 즉흥 연주해 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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