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이라는 마약 끊기 | 뉴욕 N잡러의 생존 기록

거대한 항공모함에서 내려 작은 뗏목을 띄우다

by morasafon

"우리는 왜 월요일 아침마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걸까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녀가 웃었다. 뉴욕의 마천루 숲 어딘가, 자신의 서재에 앉아 있는 Zayda(가명). 그녀는 20년 동안 뉴욕의 치열한 IT 업계에서 살아남은 베테랑이었다. 흔히 말하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표본.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다음 문장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사람들이 괜히 그걸 '일(work)'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에요. 돈을 주지 않으면 아무도 안 할 짓이니까 일이라고 부르는 거죠."


너무나 솔직해서 통쾌하기까지 한 정의였다. 그녀는 자신을 '은퇴자'라고 소개했다.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은퇴가 아니었다. 그녀가 정의하는 은퇴란, '생계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의미했다.



거대한 선전(Propaganda)에 속지 마세요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해요. 화면 너머로 대화하다 보면 깨닫게 되죠. 국경 너머 평범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걸요. 뉴스나 미디어에서 떠드는 건 대부분 정부나 특정 집단의 '선전(Propaganda)'일 뿐이에요. 진짜 이야기는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만 들을 수 있죠."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 그리고 직장 생활에서 강요받는 '성공의 방정식' 또한 일종의 선전일지 모른다. '열심히 일해서 승진하고, 연봉을 높이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거대한 믿음 체계. Zayda는 그 믿음의 한가운데서 20년을 보냈고, 어느 순간 그곳이 천국이 아닌 철창임을 깨달았다.



팬데믹이 알려준 잔인한 진실: '한 방'은 없다


"코로나 팬데믹이 닥쳤을 때, 뉴욕은 아비규환이었어요. 제 주변의 수많은 동료가 하루아침에 책상을 빼야 했죠.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절대 하나의 수입원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그녀는 화면을 공유하며 자신이 요즘 몰두하고 있는 '일'을 보여주었다. 모니터 가득 채운 것은 복잡한 코딩 언어가 아니었다. 화려한 색감의 새, 기하학적인 패턴의 나비, 그리고 따뜻한 문구가 적힌 머그컵 디자인들이었다.


"예전엔 여행지마다 머그컵을 사 모으는 게 취미였어요. 그러다 1년 반쯤 전에 문득 생각이 들더군요. '왜 남이 만든 것만 사야 하지? 내가 직접 만들면 되잖아.'"


20년 차 IT 전문가의 손에서 탄생한 것은 의외로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머그컵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지극히 전략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AI 이미지 생성 툴을 이용해 머릿속 아이디어를 시각화하고, POD(Print on Demand, 주문형 인쇄) 서비스를 통해 재고 없이 전 세계로 제품을 판매한다.


"저는 창작자(Creator)이자, AI와 생산 업체를 연결하는 '중간의 사업가(Businessman in the middle)'입니다."



항공모함에서 내려, 나만의 소형 선단을 꾸리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안정성'을 신봉한다. 공무원, 대기업이라는 거대하고 튼튼해 보이는 항공모함에 탑승하기 위해 젊은 시절을 바친다. 하지만 Zayda의 시선은 달랐다. 그녀에게 직장이란 '언제든 침몰할 수 있는 배'였다.


"저는 사람들에게 항상 '사이드 허슬(Side Hustle)'을 준비하라고 조언해요. 단순히 용돈 벌이가 아닙니다. 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을 여러 개 세우는 작업이죠."


그녀는 이제 거대한 항공모함에서 내렸다. 대신, 커리어 코칭이라는 뗏목, 머그컵 디자인이라는 보트, 그리고 비즈니스 컨설팅이라는 요트 등 여러 척의 작은 배를 띄워 자신만의 함대를 꾸렸다.


이 전략의 가장 큰 장점은 '회복 탄력성'이다. 하나의 배가 풍랑을 만나 뒤집혀도, 나머지 배들이 그녀를 지탱해 준다. 주 30시간, 그녀는 오직 자신이 선택한 일들로만 시간을 채운다. 억지로 하는 일이 없기에 스트레스는 사라졌고, 역설적으로 수익 구조는 더 단단해졌다.



당신의 배는 몇 척입니까?


인터뷰 말미, "당신은 정말 멋진 사업가군요"라는 나의 칭찬에 그녀는 편안한 미소로 답했다.

"네, 그리고 저는 행복한 은퇴자이기도 하죠."


우리는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받았는지 모른다. 회사라는 이름의 한 척의 배에 나와 내 가족의 모든 운명을 싣고, 태풍이 오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적어본다. 그것이 언젠가 거친 파도로부터 나를 구해줄 구명보트가 되어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사이드 허슬(Side Hustle)

은 본업 외에 추가 수입을 얻기 위한 부업이나 활동이다. 이 개념은 단순히 돈을 버는 차원을 넘어서, 개인의 열정과 취미, 자아실현, 경력 다각화를 위한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긱 이코노미의 확산과 고용 불안정이 증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안정과 개인적 만족을 위해 사이드 허슬을 추구한다. 실제로 미국 성인의 약 40%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이드 잡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 약 30%는 생활비 충당을 목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Gen Z 세대는 전통적인 직업보다 유연한 수입 구조를 선호하며, 사이드 허슬을 삶의 주요 전략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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