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업을 고집하는 이유 | 지중해 웹툰 작가 이야기

가장 비효율적인 일이, 때로는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된다

by morasafon

창작이란 어떤 의미일까. 특히 한 사람의 인생에서 긴 시간을 들여 완성한 위대한 작품을 보며,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그 기나긴 여정을 견뎠을지 궁금해지곤 했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미덕이 된 사회. 인공지능이 단 몇 분 만에 근사한 결과물을 내놓는 시대에, 여전히 자신의 두 손으로 거대한 우주를 엮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생각으로 자신의 길을 가는 걸까. 그 순수한 열정과 고집의 근원이 궁금했다. 30대 초반 서아시아 지중해 출신의 디지털 아티스트이자 웹툰 작가인 Maida(가명)와의 대화는 이에 대한 하나의 답이었다.



"AI를 쓰지 않아요"


“요즘 AI 툴을 활용하는 작가들도 많던데, 당신도 사용하나요?”

나의 첫 질문은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Maida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아니요, 저는 모든 걸 직접 합니다. AI는 쓰지 않아요. 제가 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바로 ‘나’라는 사람이 직접 만들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여러 작가가 함께 연재하는 웹툰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독립 작가다. 스토리를 구상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모든 과정을 혼자 해낸다. 이 플랫폼은, 그녀에게 자신의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는 소중한 무대다. 그녀는 이를 통해 아직 큰돈을 벌지는 못한다고 했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누구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무료로 공개하고 있었다. 돈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그녀를 이끌고 있는 듯했다.


400개의 챕터, 한 편의 거대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시


그녀가 그리는 웹툰의 장르는, 인류 문명이 멸망한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tic)와 초자연적(Supernatural)인 현상을 결합한 것이다.


“단순한 SF 판타지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사랑과 연민, 유대감에 관한 이야기예요. 제가 경험하고 배워온 철학들을 담아내고 싶었죠.”


그녀는 이 정교한 세계관을 10년 전부터 구상해 왔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에야 첫 챕터를 세상에 공개했다.


“지금 10번째 챕터를 작업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계획된 챕터가… 400개가 넘습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400개. 어쩌면 700개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금의 작업 속도로는 완결까지 족히 10년은 넘게 걸릴 대장정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처럼, 긴 시간을 바쳐야만 완성될 수 있는 거대한 서사시였다. 문득 작품의 전체 스토리는 이미 다 구상해 둔 것인지 궁금해졌다.


“큰 줄기와 엔딩은 정해져 있어요. 하지만 그 사이를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즉흥적인 아이디어가 더해지죠. 캐릭터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변해가요. 마치 정교한 설계도 위에서 유기적인 건축물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죠.”


이미 발행된 챕터는 수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선택을 존중하며, 미래의 이야기로 그 선택의 의미를 증명해 나갈 뿐이다. 그녀는 이야기의 창조주이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가 스스로 흘러가는 방향을 따르는 관찰자이기도 했다.


"만약 이 일을 멈춘다면, 내 일부가 죽을지 몰라요"


나는 이 거대한 여정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이라는 시간, 400개가 넘는 챕터.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 이야기는 제 삶 자체예요. 제가 직접 겪은 경험과 상징들, 다른 이들을 통해 배운 모든 것이 녹아있죠. 삶이 제 스승이었고, 저는 그 가르침을 세상과 나누고 싶을 뿐이에요. 이 이야기와 캐릭터, 세계관은 모두 제 일부입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만약 제가 이 일을 멈춘다면, 제 자신의 일부가 정말로 죽을지 몰라요. 그 정도로 저에게는 소중한 일입니다. 저는 제 인생과 커리어를 이 이야기에 바치기로 결심했거든요.


왜 어떤 이들은 세상의 속도에 역행하면서도 자신만의 우주를 만드는지. 그녀는 효율이나 생산성을 위해 작품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 삶 자체였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위대한 작품이란 뛰어난 기술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의 산물이 아닐지 모르겠다. 자신의 삶을 통째로 갈아 넣고, 그 시간 속에서 묵묵히 쌓아가는 한 인간의 시간이자 분투기였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힘이 아닐지. 나는 10년 뒤, 그녀가 그려낼 세상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그리고 그 안에 담길 한 사람의 우주를 응원기로 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Post-apocalyptic Fiction)

대재앙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과학 소설의 하위 장르이다. 핵전쟁, 전염병, 기후 변화, 외계인 침입, 기술적 특이점, 초자연적 현상 등으로 기존의 문명이 붕괴한 세상에서 생존자들이 겪는 투쟁과 새로운 사회 질서의 형성을 주로 다룬다. 시간적 배경은 재앙 직후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까지 다양하며, 생존자들의 심리적 고통과 투쟁에 초점을 맞추거나, 재앙 이전 문명의 존재가 잊혀지거나 신화화된 먼 미래를 그리기도 한다. 단순한 생존기를 넘어 인간성, 도덕성, 희망과 같은 철학적 주제를 깊이 탐구하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이다. 특히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과 사회적 유대, 문명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중요하게 다룬다.

매거진의 이전글빛나던 시절의 그늘 | 80년대 미국 미용업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