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던 시절의 그늘 | 80년대 미국 미용업계 이야기

스러져간 헤어 아티스트들을 위한 진혼곡

by morasafon

여러 권의 책을 낸 미국인 작가 Lukaor(가명)는 이번에는 1980년대 헤어 업계를 배경으로 새로운 글을 쓰는 중이었다. 그 업계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그는, 화려함과 비극이 공존했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생생한 증인이었다.


가위 하나로 시대를 디자인한 혁명가, 비달 사순

“1980년대에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된다는 건, 무언가 엄청난 일의 정점에 서는 것과 같았어요. 어떤 면에선 영화배우보다 더 유명했죠.”


그 중심에는 혁명가와도 같았던 비달 사순(Vidal Sassoon)이 있었다. 당시 그의 이름은 단순한 브랜드를 넘어, 혁신 그 자체를 의미했다. ‘사순 국제 공인(Sassoon International accredited)’ 을 받기 위해 살롱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그는 머리카락에 대한 개념을 바꿨어요. 비대칭 커트, 한쪽만 과감하게 밀어버리는 스타일, 심지어 타투까지 접목했죠. 사람들은 그런 광기에 가까운 새로움을 원했어요.”


프랑스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 영국 출신이었던 그는, 복잡한 스타일링에서 여성을 해방시킨 ‘워시 앤 웨어(wash-and-wear)’ 스타일을 창조했다. 그의 가위 끝에서 탄생한 기하학적인 커트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열리는 헤어 쇼는 조명, 음향, 거대한 무대 장치까지 동원된 한 편의 브로드웨이 연극이었다. 입생 로랑, 루이뷔통처럼 훗날 패션계를 뒤흔든 거장들조차 커리어의 시작은 헤어 또는 뷰티 업계였다. 창의성이란 이름의 에너지가 들끓던 시대. 모두가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화려한 무대 뒤, 1908년대의 짙은 그늘

하지만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걸까. Lukaor는 화려했던 시절의 정점을 지나, 어둡고 아픈 기억으로 이야기를 옮겼다. 성공의 압박감 속에서 많은 아티스트들은 더 높은 창의성을 위해 코카인 같은 약물에 기댔다. 그리고 더 치명적인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이즈(AIDS)로 정말 많은 친구들을 잃었어요. 너무 젊고, 너무 재능 있는 친구들이었죠.”


그의 목소리가 순간 먹먹해졌다. 처음에는 ‘게이 암’이라는 흉흉한 이름으로 불리던 미지의 질병.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그들은 스무 살 남짓한, 이제 막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시작한 젊은이들이었다.


“바로 옆에서 연달아 다섯 명의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어요. 그중 제가 정말 아꼈던 Peter(가명)은 겨우 스무 살이었죠.”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던 사람만 최소 스물네 명이 에이즈로 죽었다고 했다. 한창 자신의 창의성을 꽃피우던 정점에서 말이다. 장례식에 너무 많이 간 나머지 더는 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화려한 무대 뒤에서, 한 시대의 아티스트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기록한다는 것, 잊혀진 목소리를 되살리는 숙명


나는 그토록 아픈 기억을 글로 옮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집필 과정을 설명했다.


“책을 쓰려고 앉으면, 사실 제가 쓰는 게 아니에요. 등장인물들이 제 안으로 뛰어들어와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죠. 저는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그릇(vessel)이 되는 기분이에요.”


그의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잊힌 이들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이번 글은 1980년대 헤어 업계의 찬란함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시대의 상처를 외면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그의 책은 성공 신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신화 뒤에서 스러져간 한 세대의 아티스트들을 위한 진혼곡에 가까웠다.


아픈 기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승화시켜 세상에 내보내는 작가의 숙명. 그는 글쓰기를 통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빛과, 그 빛의 그림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1. 비달 사순 (Vidal Sassoon)
비달 사순은 1960년대 기하학적 커트와 ‘워시 앤 웨어’ 스타일을 창시하며 헤어 업계의 혁명을 이끈 영국의 헤어 디자이너다. 그는 복잡한 세팅 없이도 형태가 유지되는 컷을 선보여, 모던한 스타일의 상징이 되었다. ‘밥컷’을 세계적으로 유행시켰으며, 이후 살롱과 제품 브랜드를 전 세계에 확산시켜 현대 헤어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2. 1980년대 에이즈
HIV/AIDS는 1981년 미국에서 처음 보고된 이후 1980년대 전 세계적 확산으로 큰 공포를 불러왔다. 초기에는 원인과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아 ‘죽음의 병’으로 불렸으며, 특정 집단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했다. 패션·예술·문화계에서도 수많은 인재가 희생되며 업계 전반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3. 1980년대 미국의 패션과 문화
1980년대는 경제적 풍요와 함께 과감하고 화려한 패션이 유행한 시기다. 파워숄더, 네온 컬러, 과장된 헤어와 메이크업이 대중문화의 특징이 되었고, MTV의 등장은 음악·패션·스타일을 결합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이 시기 슈퍼모델과 스타 디자이너가 부상하며,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도 대중문화의 중요한 주체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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