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병들게 한 안정감 | 아일랜드 공무원을 떠난 이유

때로는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감옥이다

by morasafon

안정적인 삶. 매달 정해진 날에 월급이 들어오고, 은퇴 후에는 연금이 보장되는 삶.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안정’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단어였다. 특히 팬데믹 이후 높아진 물가와 불안한 미래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Ellas(가명)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녀는 몇 년 전, 18년간 일했던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연금과 퇴직금, 그 어떤 것도 보장받지 못한 채였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선택. 그녀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했을까.


안정적인 직장이 몸에 새긴 상처들


Ellas는 아일랜드의 지방 정부기관에서 18년간 일했다. 한국으로 치면 ‘공무원’과 같은 직업이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그야말로 안정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을 돕는 일을 좋아했고, 자신의 업무에 자부심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직의 경직된 문화와 비합리적인 시스템이 그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조직 문화가 무척 해로웠어요(toxic). 무능한 관리자들, 문제를 일으키는 동료들… 하지만 누구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죠. 결국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만 모든 부담을 떠안는 구조였어요.”


스트레스는 몸으로 나타났다. 원인 모를 두통과 가슴 두근거림이 잦아졌고, 피부에는 붉은 발진이 돋아났다. 위장 장애는 만성이 되었다. 몸이 보내는 위험 신호였다. 완벽한 번아웃이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휴식을 권했고, 그녀는 병가를 냈다. 하지만 사무실에 다시 발을 들일 생각을 하자 온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물리적으로 출근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고 했어요. ‘연금은 어떡할 거냐’면서요. 저는 되물었죠.

‘제가 연금을 누릴 만큼 살아있지 못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인생은 너무 짧잖아요. 어떤 직장도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다닐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사표를 냈다. 퇴직금도, 연금도 없이 빈손으로 직장을 떠났다. 모두가 선망하는 안정을 스스로 걷어찬 선택은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때보다 행복했다. 마침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숨 쉴 수 있게 되었다는 해방감 때문이었다.


나를 지켜줄 거라 믿었던 것을 떠나보내다


Ellas는 직장을 그만두기 전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녀가 찾은 것은 ‘반사요법(Reflexology)’라는 분야였다. 세상에 긍정적인 치유의 에너지를 더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에서 시작된 공부였다. 손이나 발바닥의 반사구를 자극해 몸의 균형을 되찾아주는 이 요법은, 어쩌면 그녀 자신에게 가장 먼저 필요했던 치유의 과정이었다.


그녀는 자격증을 딴 뒤, 다니던 직장을 파트타임으로 전환하고, 집에서 반사요법 전문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꿈은 몇 달 만에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혔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든 대면 테라피가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다른 비대면 부업을 찾아 나섰고, 18년간의 직장 생활을 청산했다.


물론 경제적인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아일랜드의 높은 생활비에 부담을 느끼며, 더 저렴한 스페인이나 태국 같은 나라로의 이주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초조함 대신 평온함이 느껴졌다. 작지만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어 주거비 부담이 없다는 점을 ‘큰 행운’이라고 했다. 불안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여유. 그것은 그녀가 가진 내면의 힘이었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혹은 ‘안정’이라는 이름 아래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애써 외면하며, 마음의 상처를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두가 Ellas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수는 없다. 각자의 어깨에 짊어진 책임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안정이라는 울타리가, 때로는 우리를 가두고 병들게 하는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반사요법 (Reflexology)

반사요법은 손이나 발의 특정 부위(반사구)를 자극하면 그에 상응하는 신체 기관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 대체요법이다. 반사구는 신체 각 부위와 연결된 ‘지도’로 간주되며, 해당 지점을 누르거나 마사지함으로써 혈액순환 촉진, 긴장 완화, 스트레스 경감 등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주로 보조적 치유 수단으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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