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희지도 검지도 않습니다 | 남아공의 인종차별

때로는 선명한 구분이 잔인한 폭력이다

by morasafon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 정책이 종식되고,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한 편의 영화와 같은 곳. 오랫동안 억압받던 이들이 마침내 자유를 되찾고, 이제는 모두가 행복해졌을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림자


Suvenar(가명)는 50대의 남성으로 그의 피부색은 백인보다는 어두웠고, 흑인보다는 옅었다. 그는 스스로를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제가 어렸을 땐, 그러니까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엔 ‘너무 검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기회를 얻지 못했어요. 좋은 학교도, 괜찮은 직장도 그림의 떡이었죠.”


백인 정권이 만든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그는 명백한 피지배층이었다. 그리고 1994년, 세상이 뒤집혔다. 모두가 환호하던 그 변화의 순간 이후, 역설적이게도 그의 삶은 또 다른 벽에 부딪혔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는 ‘너무 희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어요. 과거의 차별을 바로잡기 위해 흑인을 우대하는 정책(Affirmative Action)이 생겼거든요. 그러자 이번엔 제가 설 자리가 없어진 겁니다. 평생 좋은 직업 한번 가져보지 못했어요. 과거에도 지금도, 저는 그저 중간에 끼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I cannot be anyone.” 나는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하나의 거대한 불의가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형태의 소수자가 그림자처럼 생겨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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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그 단순한 이분법 너머


과거의 기득권이었던 백인들은 새로운 정책 아래 역차별을 받으며 일자리를 잃고 해외로 떠났다. 그 빈자리는 교육받을 기회가 부족했던 흑인들이 채웠다. 문제는 발전소처럼 고도의 기술과 숙련도가 필요한 중요 인프라 영역에서도 이런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남아공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전기가 끊기는 일이 발생한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의도치 않은 파편이 되어 사회 곳곳에 박히고 있었다. 백인은 흑인을 존중하지 않고, 흑인은 백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사이에서 Suvenar와 같은 이들은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한 채 떠돈다. 세상은 ‘악당’을 몰아내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동화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선, 보이지 않는 사람들


남아공의 이야기는 단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쉽게 재단하고 구분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매 순간 선을 긋는다. 남자와 여자, 내국인과 외국인, 정상과 비정상. 그리고 그 선은 누군가에게는 안도감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된다.


사회는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선들은 단단하다. 하나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만든 제도가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되는 모습은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선’ 그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어떤 범주 안에 가두고, 그 범주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가능성을 재단하고 기회를 박탈하는 세상의 관성 말이다.



1.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 국민당 백인 정권이 1948년부터 1994년까지 시행한 극단적인 인종차별 및 분리 정책이다. 정부는 인구등록법과 집단지구법 등 법률을 통해 전 국민을 인종별로 분류하고 거주 지역을 강제로 분리했다. 이를 통해 백인 소수 집단의 지배력을 유지하며 교육, 고용, 정치 등 사회 전반에서 비백인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을 자행했다. 넬슨 만델라가 이끈 국내 투쟁과 국제사회의 강력한 압박에 따라 1994년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총선이 실시되면서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2. 적극적 우대조치 (Affirmative Action)

남아공의 적극적 우대조치는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한 인종 간 경제 불평등을 해소하고 과거 차별받은 집단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도입된 정책이다. 이는 '고용평등법'과 '흑인 경제력 강화 정책(BEE)' 등으로 구체화되었으며, 혜택 대상은 법적으로 아프리카 흑인, 유색인, 인도계를 모두 포함한다. 해당 정책은 기업의 고용, 지분, 임원 구성 등에서 과거 소외 계층의 참여를 의무화하여 부와 기회의 재분배를 목표로 한다. 하지만 능력주의에 반한다는 비판과 함께 백인 등에 대한 '역차별' 논란을 낳았고, 그 혜택이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된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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