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경험이 유연한 무기가 될 때
마흔. 한국 사회에서 '마흔'이라는 나이는 새로운 시작보다는 안정을, 도전보다는 유지를 강요받는 나이로 여겨지곤 한다. 특히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AI 시대에 40대의 경력 전환은 무모한 꿈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너무 늦었다’는 세상의 속삭임과 스스로의 불안감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영국인 Dairon(가명), 그는 이 통념의 강을 거슬러 올랐다.
Dairon의 첫 번째 세상은 나무의 질감과 냄새로 가득했다. 열다섯에 학교를 떠나 목수가 된 그는,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사랑했다.
“제 세상은 언제나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일터로 향하는 것이었어요.”
그에게 컴퓨터는 낯선 세계의 물건이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 그는 이미 바닥 평면도를 계산하고 필요한 자재의 양을 뽑아내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수학에 자신이 있었던 그에게 컴퓨터는 가장 효율적인 연장이었다.
하지만 미래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영국 경제에 불어닥친 깊은 불황은 그의 손에서 연장을 앗아갔다. 일거리가 사라진 거리에서 그는 막막함을 느꼈다. 그때 정부가 실직자들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이 그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너 컴퓨터 좋아하잖아. 컴퓨터 과정을 한번 들어봐."
“제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어요.” 그는 처음엔 망설였다.
평생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온 그에게 학문과 기술의 세계는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적성 검사에서 97%라는 높은 점수를 받은 그는 용기를 냈다. 그렇게 마흔두 살에 대학생이 되어 학사 학위를, 마흔네 살에는 석사 학위까지 마쳤다. 4년 반 동안 쉼 없이 세 개의 과정을 끝마친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졸업 후, 그는 대형 은행의 IT 부서에 취직했다. 티셔츠와 청바지 대신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로 출근하는 삶. 그것은 “마치 다른 세상”과 같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대학 교육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손으로 나무를 다듬던 목수는, 이제 논리와 데이터로 시스템을 구축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40대 경력 전환은 단순히 직업을 바꾼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새로 배우는 과정이었다.
새로운 세상은 달콤했지만, 만만하지는 않았다. 은행과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10여 년간 경력을 쌓은 후, 50대 중반이 된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컴퓨터 분야에서 일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더군요.”
그의 풍부한 경험과 자격증은 나이라는 장벽 앞에서 힘을 잃었다.
많은 기업이 젊은 인재를 선호했다. Dairon은 IT 업계의 두 가지 경향을 짚어냈다. 하나는 젊은 직원들을 10년쯤 소모하고 번아웃이 오면 쉽게 교체해 버리는 ‘기업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경험과 사고방식을 가진 나이 든 직원을 부담스러워하는 문화였다.
“그들은 자신만의 경험을 가진 사람을 원하지 않아요. 그저 백지상태의 젊은 두뇌를 원하죠. 자신들의 철학을 주입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하지만 Dairon은 자신의 경험이 낡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돈을 버는 대신 다른 가치를 좇기로 했다. 두 곳의 자선단체에서 수년간 보수 없이 IT 기술 지원 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생계를 위해 일주일에 며칠은 다시 목수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는 주로 남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다가 갑자기 컴퓨터를 다뤄야 하게 된 나이 든 여성들을 도왔다. 컴퓨터 전원 버튼 누르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이들이 이메일을 보내고, 가계부를 정리하며 자신감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거액의 월급보다 훨씬 보람 있는 일”이었다.
60대 중반에 공식적으로 은퇴한 그는 삶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은퇴는 “삶의 또 다른 챕터”일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파라다이스라 부르는 태국에서 수년간 머물며 따뜻한 날씨와 여유로운 삶을 즐겼다. 지금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온라인으로 사이버 보안, 인공지능 같은 최신 기술을 공부한다.
“몸은 늙어가지만, 뇌는 건강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많은 영국의 은퇴자들이 연금이 부족해서, 혹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계속한다. 하지만 Dairon은 배움을 통해 스스로의 일과를 채우고 있었다.
Dairon의 이야기는 경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경험은 때로 낡고 뒤처진 것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의 삶은 증명한다. 수십 년간 목수로서의 감각이 논리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 되고, 수많은 거절의 경험이 타인을 돕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어졌음을. 그의 경험은 낡은 것이 아니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자산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낡은 경험' 속에 숨겨진 다음 챕터는 무엇이냐고.
1980년대 후반 영국의 경기 침체 (Recession in the United Kingdom)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 영국 경제는 심각한 경기 침체 국면에 진입했다. 이 침체의 배경에는 1980년대 후반의 금융 규제 완화로 인한 '로슨 붐(Lawson Boom)'이라 불리는 과열된 신용 팽창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이로 인한 높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1989년 말 15%까지 인상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이는 결국 주택 시장 붕괴와 자산 가치 폭락으로 이어지며 경제 전반을 급격히 냉각시켰다. 이 여파로 영국의 실업률은 10%를 넘어섰으며, 특히 건설업과 제조업 분야의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일자리를 잃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급증하는 실업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고용 훈련(Employment Training)'과 같은 다양한 직업 재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운영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실업 통계를 관리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직자들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다른 분야로 경력을 전환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