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행복해질 거라는 위험한 믿음
나는 어쩌면 ‘U자형 행복 곡선’이라는 통계 뒤에 숨고 싶었는지 모른다. ‘U자형 행복 곡선’이란, 인간은 유년기와 노년기에 가장 행복하고 40대에서 50대 사이에 행복감이 최저점에 이른다는 이론이다.
지금 힘겨움은 인생의 당연한 과정이며, 언젠가 저절로 끝날 터널이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인생의 선배에게 다정한 위로와 예견된 행복의 약속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8년째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는 영국인, Laynain(가명)을 만났다.
우아한 은발에 여유롭고 넉넉한 미소, 다정다감한 음성을 가진 그녀에게 'U자형 행복 곡선'에 대해 설명하며, 나 역시 통계처럼 행복 곡선의 최저점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Laynain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삶을 예로 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젊을 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중년에는 일하고 돈을 버느라 매일이 스트레스의 연속이죠."
Laynain은 U자형 행복 곡선 가설에 동의하는 듯했다. "은퇴하면 매일이 일요일 같아요. 더 이상 알람 시계도 필요 없거든요." 노년은 과거의 의무와 시간표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행복 곡선 이론이 제시하는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정 연구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지라도, 그것이 지구상의 80억 인구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특정 시점의 스냅샷일 뿐이에요.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녀는 행복이 개인의 상황과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궤적을 그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Laynain 자신의 삶은 U자형 행복 곡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녀의 행복 그래프는 바닥에서 시작해 꾸준히 우상향 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 삶은 태어날 때부터 바닥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래프는 평평했죠.”
9살 때부터 홀로 지내며 부모, 형제, 친척 등 가족이라는 울타리 없이 자란 그녀에게 어린 시절은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한다.
그녀의 행복 곡선이 상승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해 돈을 벌고 결혼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삶은 여러 굴곡을 거치며 행복은 잠깐씩 주춤하기도 했지만, 은퇴와 함께 다시 한번 크게 도약했다고.
Laynain이 누리는 은퇴 후의 행복과 자유는 막연한 낙관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냉철한 현실 분석과 과감한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국에서의 생활비와 제 연금을 살펴봤을 때,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연금만으로 영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녀는 대안을 찾아 나섰다.
몇 년 전 휴가차 방문했던 태국의 저렴한 물가와 따뜻한 기후를 떠올린 그녀는 ‘해외 은퇴’를 선택했다. 젊지 않은 나이이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삶의 터전을 옮기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8년간 태국에서 거주하며 급격한 우상향 곡선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녀는 행복은 노년기가 되었다고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은퇴를 미리 계획하지 않아 갑작스러운 자유 앞에서 혼란을 겪는 친구들의 사례를 언급하며, 행복한 노년은 철저한 은퇴 준비와 계획의 산물임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40대~50대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이 시기가 개인이 짊어진 사회적 역할의 무게가 정점에 달하는 때라고 했다. 특히 자녀를 둔 경우, 15~20년간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자녀들이 독립하기 시작하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쉽다. 일과 가족, 재정 문제 등 모든 것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지만, 정작 나를 위한 것은 없는 삶인 것이다.
“이제는 당신 자신에게 시간을 되돌려주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해야 합니다.”
그녀는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는 삶의 방식에 경각심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좋은 학교에 가고, 안정된 직장을 얻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삶. 많은 이들이 이것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기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 자신이 원했던 삶인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건 아무것도 못 했잖아’라고 생각하게 될지 몰라요.”
이는 비단 자녀 유무나 결혼 여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직장에서의 성취감, 개인적인 인간관계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타인의 기대’와 ‘나의 진정한 욕구’ 사이에서 길을 잃곤 한다. Laynain은 하루에 단 30분이라도 좋으니, 모든 책임감을 내려놓고 오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조언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15년, 20년을 더 기다릴 건가요? 아니요, 당신은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건 온전히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이론에 나의 현재를 꿰맞추며 위안을 얻으려 했던 나는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행복은 언젠가 찾아오는 계절 같은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으로 가꾸는 정원이라는 것. 그러니 행복의 주도권을 타인이나 세상의 이론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되돌려주라는 따끔한 인생 조언이었다.
대화를 마치며 Laynain는, 자신의 삶은 모든 단계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진 독립된 이야기이자, 반짝이는 보석이라고 했다. 그녀의 말처럼, 인생은 단지 우하향과 우상향의 단조로운 곡선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모양과 빛깔을 지닌 보석들을 정성껏 꿰어 나가는 과정일지 모르겠다.
1. 행복의 U자 곡선 (The U-Curve of Happiness)
경제학 및 사회 과학에서 널리 논의되는 이론으로, 생애주기에 따른 행복감의 변화가 U자 형태를 보인다는 가설이다. 일반적으로 10대와 20대에 높은 행복감을 보이다가, 직장·가정 등 책임감이 정점에 달하는 40대에서 50대 사이에 최저점을 기록한 후 다시 상승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패턴은 전 세계 다양한 국가와 문화권에서 유사하게 관찰되며, 심지어 유인원에게서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 해외 은퇴 (Expat Retirement)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은퇴 생활을 보내는 라이프스타일을 의미한다. 주로 선진국 은퇴자들이 더 낮은 생활비, 온화한 기후, 새로운 문화 체험 등을 찾아 물가가 저렴한 국가로 이주하는 경향이 있다. 태국, 포르투갈, 멕시코, 말레이시아 등이 인기 있는 은퇴 이민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