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을 내가 정하는 법
마흔둘의 나이로 동료가 세상을 떠났다. 암이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은 경황없이 작은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아야 했다. ‘준비된 죽음’은 가능한가. 이야기를 듣던 일흔 중반의 Grayson(가명)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른 각도에서 비추기 시작했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했다.
Grayson은 미국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장례식은 전적으로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죽은 사람은 상관하지 않아요. 그들은 이미 떠났으니까요. 장례식의 모든 절차는 남은 사람들이 고인을 어떻게 기억하고 애도하고 싶은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미국 장례식에는 ‘뷰잉(viewing)’이라는 시간이 있다. 조문객들이 찾아와 관에 누운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다. 보통 저녁 시간에 열리는데, 이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스케줄에 맞춘 것이다. 그 다음날 교회에서 열리는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모든 과정은 슬픔을 표현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고인을 추모하는 ‘산 자들의 의식’이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는 문화적 차이뿐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Grayson은 미국의 장례 비용을 구체적인 숫자로 설명했다.
“미국에서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고 묘지를 구하려면 1만에서 2만 달러(한화 약 1,300만 원~2,600만 원)가 듭니다. 엄청난 돈이죠. 하지만 화장은 1천 달러(한화 약 130만 원)면 충분해요.”
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많은 미국인들이 화장을 선택하고, 자신의 재를 바다나 산처럼 의미 있는 장소에 뿌려달라고 유언한다. 한국에서는 환경오염을 이유로 금지된 산골(散骨)이 미국에서는 지극히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장례 방식 중 하나다.
“기업들이 바다에 쏟아붓는 오염물질에 비하면 사람의 재가 얼마나 되겠어요”라는 그의 말은, 죽음준비에 있어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미국의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가족에게 재정적 부담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 또한, 남은 이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인 셈이다.
Grayson의 이야기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삶과 나이 듦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그는 일흔 중반의 자신을 ‘연장전을 뛰고 있는 선수’에 비유했다.
“마흔둘에 세상을 떠난 당신 동료는 너무 일찍 갔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일흔에 죽는 사람을 보고 ‘너무 이르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는 이제 우주로부터 받아야 할 몫 이상을 받고 있는 셈이에요. 사기당한 게 아니죠. 그래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 아직 여기 있구나’ 하고 생각해요. 하루하루가 보너스, 연장전입니다.”
그는 노화를 ‘몸을 움직이는 여러 시스템이 점차 느려지고, 가끔 고장 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젊을 때는 의식조차 못 하던 몸의 기능들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는 것. 그는 이 자연스러운 쇠락을 두려워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사람들이 왜 죽는지 알 것 같아요”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죽음이 멀리 있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이라는 긴 경기의 마지막 휘슬과 같다는 것.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연장전’이 끝나는 순간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그의 대답은 명확했다. 바로 ‘존엄한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다.
“미국에는 호스피스 완화 의료(Hospice Care)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어요. 죽음을 앞둔 환자가 병원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을 맞이하도록 돕는 시스템이죠. 의료진이 집으로 와서 고통을 줄여주는 약을 투여해 줘요. 마치 마법 양탄자를 타고 이곳을 떠나는 것과 같아요. 차갑고 어두운 병실이 아니라, 당신의 침대에서요.”
더불어, 그는 소생술 거부 지시서(DNR, Do Not Resuscitate)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회생 가능성이 없을 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것이다. 그는 친척의 임종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의사가 생명을 하루 이틀 연장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지 물었을 때, 가족들은 거절했어요. 이미 코마 상태였거든요. 그를 그냥 가게 내버려 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그는 웰다잉(Well-Dying)의 핵심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는 데 있음을 이야기했다.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죽음은 공포가 아닌 ‘집으로 돌아가는 길(귀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Grayson과의 대화는 죽음이 단순히 삶의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관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증명하는 흔적임을 말해주었다. 그의 말처럼, 모두는 언젠가 끝날 ‘경기’를 살고 있다. 오늘, 보너스 같은 하루를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
1. 호스피스 완화 의료 (Hospice and Palliative Care)
미국에서 호스피스 케어는 의사가 질병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경우 기대 수명이 6개월 이하라고 판단한 말기 환자를 위한 의료 서비스이다. 치료를 통한 생명 연장이 아닌, 통증 및 증상 완화와 삶의 질 향상에 중점을 두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메디케어(Medicare) 및 대부분의 사보험이 보장하는 주요 혜택이며, 환자가 자신의 집이나 전문 시설에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반면, 완화 의료(Palliative Care)는 질병의 단계와 상관없이 치료와 병행할 수 있는 보다 광범위한 고통 완화 의료 서비스를 의미한다.
2. 사전 의료 지시서 (Advance Directives)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한국의 법적 용어이며,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전 의료 지시서(Advance Directives)’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개인이 미래에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원하는 의료 서비스에 대한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법적 문서이다. 여기에는 '생전 유언(Living Will)'과 '의료 대리인 위임장(Durable Power of Attorney for Health Care)'이 포함된다. 한편, '소생술 거부 지시서(DNR, Do Not Resuscitate)'는 심정지 시 심폐소생술(CPR)을 시행하지 말라는 의사의 구체적인 ‘의료 지시(Medical Order)’로, 사전 의료 지시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 문서는 대부분의 주에서 만 18세 이상의 성인이 작성할 수 있다.
3. 존엄사 (Good Death / Well-Dying)
'웰다잉(Well-Dying)'은 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표현으로, 미국에서는 주로 '좋은 죽음(Good Death)' 또는 '존엄한 죽음(Death with Dignity)'이라는 개념으로 논의된다. 이는 단순히 고통 없이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삶의 마지막을 주체적으로 계획하고 마무리하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유언장 작성, 장례 계획, 사전 의료 지시서 준비, 주변 관계 정리 등 삶을 능동적으로 정리하는 '생애 말기 계획(End-of-life Planning)'이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