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진료 vs. 무제한 대화 | 영국의 마음 치료법

효율성의 사회가 놓치고 있는 치유의 본질에 대하여

by morasafon

뼈가 부러지면 지체 없이 정형외과로 달려가 깁스를 한다. 아무도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뼈가 으스러졌을 때, 우리는 병원 대신 침묵을 선택한다. "괜찮다"는 말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고통을 삼킨다.


영국의 흐린 하늘 아래, 사람들의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한 남자가 있다. Anando(가명). 그는 자신을 ‘심리 웰빙 프랙티셔너(Psychological Wellbeing Practitioner, PWP)’이라고 소개했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에 특화된 직업군으로 심리치료사 또는 심리상담사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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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음의 감기에 약부터 처방할까


“저는 마음의 의사입니다. 일반 심리학자들이 더 폭넓은 치료법을 사용한다면, 저희는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처럼 특정 치료법에 집중하죠. 하지만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약물 처방은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수단이라는 겁니다.”


Anando는 자신의 일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 폭력에 노출된 사람, 심지어 수감자들까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삶의 기능이 무너진 이들에게 그가 가장 먼저 제안하는 것은 ‘대화할 기회’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 뇌의 화학 작용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중독성이 있을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혹독한 부작용을 낳기도 해요. 그래서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처방하지 않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 약 75%는 그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삶의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의 설명은 한국의 현실과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한국에서는 정신건강 문제로 병원을 찾으면 몇 분의 짧은 문진 후 약을 처방받는 경우가 흔하다. 늘 환자로 붐비는 병원은 효율적으로 돌아가야 하고, 환자들은 빠른 해결을 원한다. Anando는 영국의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다.


“영국에서는 동네 의사가 환자에게 심리 상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저희에게 ‘제 환자가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라는 소견서를 보냅니다. 그럼 저희는 병원에서 환자를 만나죠. 약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요. 우리는 환자가 오면 일단 이야기를 듣습니다. 몇 달이 걸리든, 때로는 몇 년이 걸리든 말이죠.”


그는 이러한 차이가 의료 시스템의 구조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했다.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세금으로 운영되기에 의사들은 제약회사의 영업 압박이나 진료 건수에 따른 수익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미국처럼 의료가 산업화된 곳에서는 제약회사가 의사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즉, 의료가 비즈니스 되어 환자의 '치유'보다 '처방'이 수익 모델이 된다.



타인의 고통을 듣는 사람


한국에서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던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나의 말에, Anando는 놀랍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도 50~60년 전에는 비슷한 편견이 있었죠. 하지만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영국은 완전히 다르다. “팔이 부러지면 의사에게 가서 팔을 고치잖아요. 감정적인 문제나 트라우마가 생기면 심리학자에게 가서 마음을 고치는 거죠. 이건 도움을 구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주 건강한 노력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취약함(Vulnerability)을 드러내며 도움을 청하는 용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기업의 인사(HR)팀에 직원의 정신건강을 돕는 산업 심리학자가 소속되어 있을 만큼, 마음을 돌보는 일은 개인의 몫을 넘어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타인의 어두운 감정을 계속해서 마주하는 일은 그에게도 쉽지 않다. 그는 외로운 노인들의 우울감부터 섬세한 아이들의 마음까지, 폭넓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다룬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를 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매달 저희도 저희의 심리상담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힘든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죠.” 그는 이 과정을 ‘감정의 스위치를 끄는 법을 배우는 훈련’이라고 표현했다. 환자와 깊이 공감하되, 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그 감정에서 건강하게 벗어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상담사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무엇일까. 그는 신뢰를 쌓는 능력과 더불어 한 가지를 더 강조했다. “환자가 당신에게 하는 말뿐만 아니라, ‘하지 않는 말’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감정을 부끄러워하거나, 남들처럼 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은 그 침묵의 언어를 듣고,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침묵이라는 이름의 감옥


Anando는 감정을 억누르는 문화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처럼 감정 표현에 서툰 사회에서는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안으로 곪아 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예의 바르고 진실하지만, 감정을 철저히 숨겨요. 한국도 비슷하지 않나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혹은 '강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슬픔을 삼키곤 한다.


"기억하세요. 연결되지 못하면 인간은 병들어요. 감정을 말로 뱉어내지 않으면(Talk out), 마음속에서 곪아 터지게 됩니다. 상담사는 바로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들어주는 사람이지요."


대화 말미에 그는 한국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한국 어린 학생들은 밤 10시, 12시까지 공부를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아이들은 뛰어놀면서 인성을 키워야 합니다. 어린 시절은 특별한 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삶의 모든 단계가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다면 대체 어디서 숨을 쉴 수 있겠어요?” 그는 한국의 아이들이 짊어진 압박감이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거대한 심리적 부채로 돌아올 것을 걱정했다.



우리는 마음이 부러졌을 때, 뼈를 맞추듯 자연스럽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통제 한 알로 통증만 지운 채 억지로 일상을 버티고 있는가. 기계가 고장 나면 부품을 갈아 끼우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고장 나면 누군가의 손길과 온기가 필요하다.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당신에게 필요한 건 수면제 한 알이 아니라,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봐 주는 누군가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Psychological Wellbeing Practitioner (PWP)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 시스템 내에서 경증 및 중등도의 우울증과 불안 장애 환자를 전담하여 돕는 특화된 전문 직군이다. 이들은 고강도 심리치료 전 단계에서 환자가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저강도 인지행동치료(Low-intensity CBT)'를 주로 수행한다. 의사처럼 약물을 처방하는 대신, 환자가 자신의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구체적인 기술을 습득하도록 가이드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는 정신과 진료의 문턱을 낮춰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초기 단계의 환자들에게 신속하고 실질적인 심리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고안된 선진적인 시스템이다.


인지행동치료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CBT)

인지행동치료는 심리치료의 한 형태로, 내담자의 왜곡되고 기능적이지 않은 사고(인지)와 행동을 수정하여 감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현재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문제를 다루는 구체적인 기술을 습득하는 데 중점을 둔다.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 다양한 정신건강 문제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 (National Health Service, NHS)

NHS는 1948년 설립된 영국의 공공 의료 시스템이다. 국적이나 지불 능력에 관계없이 영국 거주자에게 포괄적인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재원은 주로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며, 예방부터 치료, 재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서비스를 포함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건강을 책임진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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